로렌 왕국 이야기 - 복수의 서막

나는 멍-하니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니,

광경이 나를 덮치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성벽을 향해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오크들이 돌격해오고 있었다.

오크는 멧돼지의 얼굴에 초록피부를 가지고 사람과 유사한 몸을 가진 괴물로 사람보다 지능은 떨어질지 모르나, 힘에 있어선 인간을 능가하였다.

그러한 오크들 수 만이 이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위험했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오른손이 떨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공포 때문일까?

아니다.

오우거의 힘줄과 드래곤의 근육으로 재생시킨 오른팔이었다.

오크 마흔을 넘을 거대한 덩치의 거인인 오우거와 그러한 오우거 수십이 있어도 채울 수 없는 크기의 드래곤.

그들이 내 오른팔에 내장돼 있었다.

오로지 왕국을 져버리고 왕국기사에서 제국기사가 되는 조건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충성을 버리고 얻은 내 힘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내 오른손이 어느새 등 뒤에 멘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나는 달리고 있었다.

내 ‘다리’는 나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 오른팔이 주어진 이후로 전신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마치 물에 잉크를 풀어놓은 것처럼 서서히 오우거와 드래곤의 힘이 내 몸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루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강력해져갔고,

나 스스로 시험해져보고 싶어하였다.

저러한 오크의 떼에 나는 순간 놀랐지만, 그것은 예전 나의 ‘흔적’이자 당연한 ‘반응’이었을 뿐, 지금의 나는 어느새 나를 이끌고 오크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 제국을 지켜야 한다. - 비록 예전의 나는 이 왕국을 지켜야 한다, 라고 외쳤지만.

나는 함성을 내질렀다.

“이것들아-아-!”

내 첫 휘두른 검에 여섯의 오크들이 쓰러졌다.

나는 내 힘이 예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해졌음을 느꼈다.

로렌 왕국의 8대 기사의 한 명에서 파디어스 제국의 13대 기사의 한 명으로 바뀌었다. 받은 선물은 왕국으로부터 입은 축복의 힘과 함께 나의 강함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어느새 정신을 잃듯이 베기 시작한 내가 몇 시간쯤 지났을까 하고 고개를 저 너머로 돌리니 언덕 너머엔 태양이 질 무렵이었다.

나는 검을 떨구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수 만의 오크들이 성을 향해 돌진하였으나 나 하나로 인해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싸움은 끝났고, 나는 이로써 내 충성을 증명하였다.

한때 로렌의 왕자였으나, 아버지를 배신한 형으로 인해 노예로 팔려온 삶.

복수를 원했다.

by 스물 | 2009/03/03 21:50 | 심심풀이 자폭소설 | 트랙백 | 덧글(0)

무의미 농담소설 하버드, 2화

 핀잔을 주셨다.

 “버릇 좀 고쳐. 자네만 노력파는 아니니까.”

 “예.

 하지만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 그런지,

 너무 공부를 안 한단 생각이 들었더랍니다, 그때엔,

 ‘하버드대에선 놀고 먹는군’.”

 “그런데 말이야, 난 자네가 했던 대답이 기억나.”

 “무…슨.”

 “이 질문 말일세. ‘그렇다면 외우기 어려운 것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과연 일반인들이 양자물리학을 쉽게 배울 수 있을까?’”

 “아! 아까 전에 말씀하셨죠.”

 “자네가 이렇게 말했지.

 그건 우리 과학자들이 꽤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만을 가르쳐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익혀야 하는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지식만을 나열한 나머지, 무엇이 중요한지도 가르쳐주지 못하며, 어떻게 익혀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지 못하며, 결국 그들에게서 가능성 하나를 빼앗아버립니다.

결국 안타까운 미래의 과학자들을 놓치고야 맙니다.”

 지나 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몇몇 복잡한 걸 외우기 좋아하는 미치광이들만이 하버드 물리학과에 들어오게 되겠지요.’

 할아버지께 많이 들어본 말이에요.”

 “아….”

 “자네의 그 말이 인상적이었네.

난 너무 많은 걸 놓쳐온 건 아니었을까?

단지 자네 말대로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가 아니었을까?

 간혹 정신나갈 정도로 과학에 미친 또라이들 몇몇이 그걸 이해해내겠지. 과학에 미친 놈들이 가끔씩 우리 주변에도 있어. 하버드대 물리학과에 가면 그런 놈들 투성이야.

 하지만 말이야, 다른 이들은?

 어쩌면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간 이들 중에 더 재능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접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설령 업으로 삼지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나?

 자네가 딱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었지,

 ‘수업받을 수 있는 권리만큼 그 수업을 이해받을 수 있는 권리도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정말 우수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이들이… 아무렇게나 나열된 지식에 질려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볼지.”

 “예로 뭘 들었는지 기억나는가?”

 “물론이지요.

 그때 제가 한 말의 내용은 ‘과학자에겐 지식을 만드는 것만큼 그 지식을 쉽게 요리할 수 있는 소양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새로운 인식이었을 겁니다.

 제 기억으론 이렇게 예를 들었을 겁니다.

 그냥 간단하고 쉬운 예였지요.

 ‘교수님,

 이를테면 쿼크는 6종류가 있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up·down․strange·charm․bottom·top이지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만으론 외우는 게 그렇습니다. 너무 산발적입니다.

 하지만 뜻을 보면 쉬워집니다. 유사한 뜻으로 바꿔보면, 위․아래․이상한․매력적인․밑바닥․꼭대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up·down, strange·charm, bottom·top으로 묶으면 됩니다.

 ‘위’와 ‘아래’. ‘이상한’과 ‘매력적인’. ‘밑바닥’과 ‘꼭대기’.

 뜻이 이렇게 세 쌍으로 묶입니다.

 물론 이건 그야말로 쉬운 예입니다. 저는 일단 이렇게 묶어서 외웠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묶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식은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해가 깊으면 그걸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너무 지식을 방치해버립니다.’

 그때 한 말은… 적어도 우리는 과학의 문턱을 낮출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소양이 없네. 자네에게서 약간의 빛을 보지.”

 f 교수님께서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셨다.

 교수님께서 잠시 내 등 너머를 바라보시더니 손을 흔드셨다.

 누구를 부르시는가 해서 뒤를 돌아보니 서른 가량의 젊은 청년이었다.

 “이리 앉게.”

 큰 키에 잘생긴 얼굴이 인상적이었는데, 피부가 상당히 하얀 느낌이었다.

 그래서 똑같이 독일계인가 하고 생각했다.

 교수님께서 입을 여셨다.

 “이 친구 인디언이야. 우리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아니신가.”

 그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혀 인디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내가 인디언으로 말했지. 혼혈일세. 어머니가 러시아인이야. 부부가 둘 다 저기 뉴욕주립대 의대 교수야.”

 제1인종과 제2인종이 섞인 혼혈이 전혀 다른 제3인종의 모습과 비슷한 경우가 몇몇 있다. 러시아인과 인디언이 섞여 독일인처럼 보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전혀 다른 특성이 만나서 또 다른 중간특성을 만드는 셈이니까.

 어쨌거나 나로서는 그가 환영이었다.

 “반갑습니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또한 내 악수에 응하였다.

 “저야말로. 공재웅 씨라 들었습니다. 유명하시던데요.”

 “아, 예.”

 인물이 워낙에 좋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훤칠하고 잘생기셨네요”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거 배가 고프네요.”

 교수님께서 “아!”하고 알아채시더니 “내가 나이가 들다보니 배가 어디에 붙었는지 까먹었어”라며 한숨을 쉬셨다.

 “자네들, 뭐 먹을 텐가? 교수니까 내가 사지. 한번 교수가 되면 영원히 교수인 걸세.”

 “더치페이가… 낫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교수님께서 “아냐, 아냐”라고 고개를 내저으셨다.

 “저는 그냥 초밥정식으로 A세트를 고르겠습니다.”

 “나도 자네와 같은 걸로 하지.”

 지나 양과 미남 청년도 서로를 바라보더니 뜻을 정한듯 하였다.

 “할아버지, 다 드실 수 있어요?”

 “다 못 먹지. 난 아까 전에 식사하고 왔어.”

 “저는 그냥 레모네이드 하구요. 정식 세트는 무리니까, 스몰사이즈 세트로 고를게요. 스몰 세트 중에서 참치 스시.”

 “저도 f 교수님이나 공 교수님처럼 먹고 싶지만, 조금 무립니다. 메뉴 중에 바게뜨 작은 사이즈로 할게요.”

 교수님께서 웃으시며 핀잔을 주셨다.

 “자네, 스시집에 와서 바게뜨 먹긴가? 그리고 f 교수님은 또 뭐야?”

 미남 청년의 얼굴이 빨개졌다.

 지나 양이 나를 보더니 “별명 지어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작고, 하얗고, 똑똑하지? 네잎 클로버 어떨까.’

 교수님께서 스시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 양, 그러면 네잎 클로버로 불러도 되겠어요?”

 교수님께서 부르시다 말고 나를 찾아보시더니 “자네 제정신이 아니군”하며 웃음을 터뜨리셨다.

 “괜찮네요. 네잎 클로버. 닉네임치고 좋아요.”

 f 교수님께서 “아!”하고 뭔가 깨달으시더니,

 “자네 물리학 석사 과정은 언제 배워지?”,

 라고 물으셨다.

 “하버드 물리학 석사 과정은 고등학교 때 독학했습니다.

 하버드에서 배우는 책으로 똑같이 배웠으니까요.”

 “그때도 이렇게 대답했었지.

 내가 뭐라고 핀잔했었는지 기억나나?”

 “글쎄요.”

 “나는 그걸 물은 게 아닐세!”

 “……?”

 “자네하고 나하고 같이 글썼을 때 말한 걸세. 자네가 내 논문 돕고서 그 다음 시기 말이야.”

 “아, 그거 말씀하신 겁니까? 그거야 몇 년 안 됐겠습니까.”

 “이 친구가 자네가 썼던 첫물리학 책을 보고서 반했던 사내일세.”

 “아?”

 미남 청년을 보더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이름이 카우초틴 스미스 씨 아닙니까? 팬레터를 주셨던?

 아니겠죠, 설마.

 그럴 리가.

 하긴.

 …당연하겠지…”

 나 스스로 말하다가 ‘확신을 잃어 말꼬리가 흐려졌다’.

 “맞습니다.”

 “예!?”

 당황했다.

 “카우초틴 스미스입니다.

 아버지께서 카우초틴이라 붙여주셨어요. 아버진 입양아라셔 사실 인디언 이름은 잘 모르셨거든요.”

 “…인디언 이름엔 대개 뜻이 있던데….”

 “카우초틴의 뜻은 ‘위대한 산토끼의 부족’입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위대한’하고 ‘산토끼’가 잘 매치는 안 되는군요. 제가 편견이 심한가요.”

 교수님께서 장난스럽게 “미남 산토끼라 불러야겠군”이라 말씀하셨다.

 교수님께서는 가게주인에게 음식을 주문하면서도 ‘뭔가 얘길’ 나누고 계셨다.

 카우초틴이 말하였다.

 “아버지께선 조금 무책임하셨어요.

 뜻도 모르셨죠. 제가 중학생이 돼서야 스스로 찾아보다 찾아보다 알게 됐으니까.

 제가 뜻을 말씀드리니까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 뜻이 왜 그렇게 우습니?’”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은 창피해주겠는데, 아버진 자기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일일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 아들 이름 뜻이 뭔지 알아? 글쎄, 위대한 산토끼의 부족이야. 맙소사! 나도 짓고서도 몰랐지!’”

 네잎 클로버가 너무 우스꽝스럽다 느꼈는지 웃으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기에다가, 카우초틴이란 이름은 사람 이름도 아니고, 원래 부족 이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우스꽝스럽지요. 이름이 미국이라든가 영국, 일본, 중국 내지는 프랑스 같은 거니까요.”

 네잎 클로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뻐요, 그래도 그 이름은”

 나는 웃다가 문득 옆을 바라보니 가게주인은 이미 돌아가 있었고, 그새 주문이 끝났는지 저 멀리서 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탁탁탁탁’거리는 생선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지켜보니, 이래저래 뭔가 재료들이 주인의 손에서 오갔고, 본격적으로 초밥을 만드는지 얇고 부드럽게 생선을 썰기 시작했다. 아까 전과는 달리 써는 데에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 교수님께 “언제 주문이 끝났지요?”라고 물으니, “자네가 ‘위대한 산토끼’에 정신이 빠져 있었을 때”라 대답하셨다.

 다시 돌려보다 문득 서로의 눈이 마주쳤는데,

 네잎 클로버가 싱글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분위기가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교수님께서 네잎 클로버를 바라보는 표정에 아쉬움과 행복이 가득했다.

 ‘그녀를 왜 불러오신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매우 행복으로 가득한 아가씨였다.

 그리고 교수님껜 자신의 전부였다.

 그렇다,

 교수님은 손녀딸 외엔 가족이 없으셨다.

 그 외에 아무도 없으니까.

 아들은 8살이 되던 해에 소아암으로 죽었고, 딸은 장성하여 결혼까지 치루었지만 아이를 낳고서 생명을 잃었다.

 결국 그에겐 손녀딸 밖에 남질 않았다. 그는 매우 외로운 분이셨다. 아내까지도 젊은 나이에 사별하여 혼자서 딸을 길러왔으니까. 이상하게 결혼을 할래도 연이 닿지 않으셨다 들었다.

매우 외로우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분께서 아내를 잃고서 그 후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매우 고독하고 슬픈 느낌을 가져다주곤 한다.

 그 분이 네잎 클로버를 애지중지 키워왔단 말은 이미 학생 때부터 파다했다.

 이래저래 교수님에 대한 말을 듣다보면, 느끼는 것은, ‘매우 외로운 분’이라거나 ‘그러면서도 밝고 노력하시는 분’이라든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 매우 크신 분’이란 것이었다.

 내가 아는 바는 이렇다.

 딸의 생명이 손녀와 바뀐 후.

 그의 사위는 재혼했으나, 그 이후로도 교수님께선 쭈욱 자기 손으로 네잎 클로버를 맡아 기르길 원하셨다 한다. 유일한 딸의 ‘흔적’이었으니.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사위가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에 네잎 클로버는 그에게 맡겨지게 된다.

 일단 재혼한 상대가 전부인의 아이를 원치 않았고, 그 사위로서도 장기적인 안목을 보면 아이를 남기는 게 좋을 것 같다 판단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먼 미래를 보아 미국대학에 진학하려면 미국에서 계속 배우는 게 나을듯 싶었던 것이다.

 새 부인의 거부, 아이의 진학, 교수님의 바램,

 결국 교수님께서 직접 네잎 클로버를 미국에서 데리고 키우셨다. 살림까지도 도맡아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참 대단하시단 생각이 들었다.

 연구욕도 대단하지만,

 ‘그는 아버지였을 것이다’.

 6년간 아버지가 되어 키워온 것은 작은 부분일지 모른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양육을 희망해온 걸 보자면,

 정이 웬만한 아버지보다 크면 크지, 작진 않을 것이다.

 교수님의 표정에서

 뭔가 모를듯한 <그리움과 아픔>이 보이는 듯 했다.

 교수님께서 자기자신을 향한 내 시선을 눈치채셨는지 네잎 클로버를 보다 말고 나를 향해 윙크를 하셨다.

 그 표정에 담겨 있던 잠시간의 아픔이 다시 사라져버렸다.

 ‘뭔가 이유가 있으셔. 분명해.

 그냥 부르신 건 아닐 거야.’

 마왕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이래저래 이 모임에 좀더 충실해질 필요를 느꼈다.

 교수님께서

 팔짱을 끼시더니

 잠시 눈을 감으셨다.

 위대한 산토끼와 네잎 클로버가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고요에 잠겼다.

 ‘교수님께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분의 눈가가 미묘하게 젖어 있음을 눈치챘다.

 마치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감고 계신 것만 같았다.

 ‘아쉬움?’

 식사가 나온 이후로도 교수님께서는 묵묵히 초밥만을 드셨다.

 위대한 산토끼와 네잎 클로버는 즐거운 얘기에 빠져서 눈치채지 못한듯 하였다.

 교수님을 보고서 느껴지는 바가 커서 나 또한 일단 조용히 초밥만을 먹었다.

 가끔씩 그 둘의 얘기에 끼어들 뿐.

 “산토끼는 젓가락질이 서툴군요.”

 위대한 산토끼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젓가락질을 잘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나 씨는 젓가락을 잘하는 게 당연할 테고, 교수님께서도 능하시군요.”

 “교수님께서는 요리물리학으로 유명하셨어요.

 요리에 대해선 전문가시죠.

 수업 평이 이랬어요, ‘물리학 3분의 1, 요리 3분의 1, 요리로 설명하는 물리학 3분의 1’.”

 위대한 산토끼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초밥을 먹는 와중에 교수님께서 얘기에 끼어드셨다.

 “초밥의 온도는 인체의 온도와 같은 36.5도가 가장 맛있지. 밥알 수는 300개. 생선의 종류에 따라 밥의 양념도 미묘하게 달라져.

 잘 만들어진 초밥을 먹으면 자기체온을 미각으로 느낄 수 있는 셈이지.”

 “아… 이게 36.5도였군요.”

 교수님의 웃음이 ‘아쉬움과 섞여’ 못내 부조화스러웠다.

 하지만 여전히 둘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교수님께서 입을 여셨다.

 “오늘 기분이 묘하군.”

 둘의 눈이 교수님께로 향했다.

 교수님께서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영혼이 정말로 있는 건지 궁금하네.”

 의아했다.

 그 분의 말씀은 계속 되셨다.

 “나는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왔어.

 하지만 나는 독실하지 못했어. 신이 과연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

 테레사 수녀와 같이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조차도 신에 대해선 의문이셨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이란 있는 것일까?

 나는 죽으면 그걸로 끝인 것일까?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나?’

 나는 내 ‘본체’에 대해 궁금하네. 나의 ‘핵심’ 말일세.

 하지만 어느 대학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네.

 나는 성경을 믿을 마음도 없고, 거기에 나오는 유태 신화를 믿을 마음도 없어. 본디 유태인들만의 성서였으니까.

 나는 모르겠네. 진짜로 신이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게 끝인가? 신이 정말로 있다면, ‘내 소원 하나쯤’은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교수님께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셨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물리학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신이 모든 시공간의 시발점이라면… 추적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있다면 결국 신에게로 귀결될 것입니다.”

 “자네는 신을 믿나?”

 “때에 따라 답은 다르겠지만.

 ‘과학자의 입장’에선 믿지 않습니다.

 그런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있더래도 ‘과연 제 생각과 같은 신’일까요.”

 “나는 미친 걸지도 모르네.

 신이 있다면 좋겠어. 아니, 신을 말하는 게 아닐세.

 내 ‘본체’ 그러니까 ‘핵심’을 말하는 것일세.

 있다면, 그게 내 생각처럼 있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좋네.”

 그 분이 마지막을 읊조리셨다.

 “나는 알고 싶네.”

 네잎 클로버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분께선 무엇이 알고 싶은지는 마저 말씀치 않으셨다.


 교수님께서는

 위대한 산토끼와 네잎 클로버를 먼저 돌려보내셨다.

 나는 인사를 드리고서 연구소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내 개인 연구소는 사실 내게 있어서 숙소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교수님과 함께 잠시 주변을 걸었다.

 교수님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내 말 들어주겠나.”

 “언제든지요.”

 “잠시 하버드로 들어가지.”

 “…교수님 차는….”

 그 분이 고개를 저으셨다.

 “그럼 제 차를 타시죠.”

 “그러세.”


 차를 모는 와중에도 해갈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마왕은 누구일까,

 그리고 오늘 무슨 뜻으로 부르셨던 걸까.’

 교수님께서 슬픈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셨다.

 “세상은 아름답군.”

 “아직 잘은 모르겠습니다.”

 “자네에겐 여분의 시간이 많아서일지도 몰라.”

 “그런가요? 사진으로 치면 90분 분량 중에서 60분 분량은 남은 셈이죠.”

 “그렇지. 오래 살아봤자, 90세에서 100세까지 밖에 더 살겠나.

 필름이 많을 땐 그 화면 하나하나의 가치에 대해 감응이 있을까.

 …모르지, 자네라면 있을지도 모르겠지….”

 “오늘 들어가시면 다른 생각 마시고 푹 주무시는 게 나을듯 하십니다.”

 “그럴까.

 생각해보면… 잠이 내 인생의 3분의 1이나 되는군.

 70년 중에 23년을 자면서 보낸 건가.”

 “휴식은 필요하지요, 몸이든 마음이든.”

 “그렇지. 둘은 분리된 게 아니지.”

 말을 마치신 교수님께선 고개를 푹 숙이며 뭔가 생각하시는듯 했다.

 그러더니 입을 여셨다, “잠시 멈추게”.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

 인적 하나 없는 외곽이었다.

 교수님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별 좀 보게.”

 나 또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많군요.”

 “저 별들은 죽는 걱정을 할까?

 “할지도 모르지요.”

 “왜지?”

 “우리의 과정을 보면… 태양으로부터 조각이 떨어져 나오고, 그 조각이 식어서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 지구의 화합물들이 반응을 일으켜 생물이 됐습니다.

우리는 별의 조각들입니다.

우리가 전혀 상상치 못하는 형식의 생물활동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혀 다른 방식의 사고활동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원적으로나, 혹은 구조적으로. 우리처럼 뇌세포와 신경망을 이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과학자는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별이 하나의 생물일 수도 있다는 거군.”

 “우리가 생물인 만큼.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의 생물일 수도 있는 겁니다.

 별들도 합쳐지고 분열하고 쇠퇴하고 다시 재생성되니까요.

 죽는 방식은 2가지 정도 되겠지요.

 다른 학자들은 분류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쉽게 수축 폭발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백생왜성’입니다. 별이 ‘수축’하면서 밀도가 극대화되는 겁니다. 그러면 별의 조각은 작아지지만 질량은 그대로가 되지요. ‘별의 무게는 우리 손톱 하나 크기에 1톤이나 됩니다’.

 다른 하나는, ‘초신성’입니다. 별이 ‘폭발’하면서 밝기가 극대화되는 겁니다. 그러면 순간이지만 터져나가면서 밝아지는 겁니다. ‘별의 밝기는 10억개의 별과 맞먹게 되지요’. 이제 폭발하면서 흩어진 가스구름들은 다른 별들의 재료가 됩니다.’

 “자연과 비슷하군.”

 “아뇨. 이게 자연이고 우주지요.”

 교수님께서 웃으셨다.

 “이게 자연이고 우주라!”

 아이처럼 가슴을 펴며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시더니 마치 별들에게 연설을 하시는 것만 같았다.

별을 향한 교수님의 강의는 계속 되었다.

 “빛이여, 나의 빛이여, 오- 나의 빛이여,

 나도 마지막만은 혼신을 다해 빛나고 싶네. 이후의 사람들은 그 빛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마치 연극대사 같이 말씀하셨다.

 “…….”

 ‘왜 이런 말씀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거지? 나이들다보니 이젠 이렇게 되는군. 지나가면서 웬 미치광이가 있다고 그럴 거야.”

 “아닙니다. 그건 의미있는 활동이었는 걸요. 가끔씩 저나 다른 사람들은 의미없이 장난삼아 아무 단어나 지껄이기도 합니다.”

 “그건 심심해서 그러는 거 아닌가.”

 미소를 지어드렸다.

 “그런가요.”

 “자! 타세! 우리는 하버드로 가야 해!”

 교수님께서 차의 문을 여시더니 장난스레 으름장을 놓으셨다, “하버드 보는 것도 그리 길지 않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 스스로도 가끔 너무 나태해있으면 ‘공재웅, 깨어나라!’라고 스스로에게 환기를 시키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그 분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스스로에 대한 자기다짐이실까?’

 하지만 그러기엔 뭔가 놓친 구석이 있었다.

 ‘알 수 없지.’

 나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교수님께선 다행히도 의식이 환기되신듯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한결 마음이 편했다.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뉴스는 아프리카의 내전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는 지금 전쟁중이랍니다.”

 “그렇지.”

 교수님께서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그러시더니 내 팔을 장난스레 툭 치셨다.

 “아야!”

 아프진 않았지만, 그 분을 위해 그냥 웃으며 과장해드렸다.

 교수님께서 입을 여시더니 찔리는 말을 하셨다.

 “자네 적색거성을 빼고 말했더군.”

 “아…, 그렇죠. 단지 별이 부풀어 올라서 붉어지는 거지요. 계속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다가 흩어져서 가스구름이 됩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교수님께서 내 본심을 말해버리셨다.

 “그렇지.

 평소의 자네라면 수축 팽창, 그리고 폭발로 분류했겠지.

 내가 ‘폭발’하길 원했나?

10억개의 별빛을 내며?

 수축의 ‘백생왜성’, 팽창의 ‘적색거성’, 그리고 폭발의 ‘초신성’이 별의 마지막이랄 수 있었는데, 나는 중앙의 적색거성을 빼버리고 ‘임의적으로 백색왜성과 초신성으로만 묶어버렸다’.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만….

드라마틱한 게 필요한 때도 있으니까요.”

 내심 죄송하기도 하여 말을 더 잇진 못했다. 하지만 속일 마음은 없었다. 선의였으니까.

 “괜찮아. 내가 매일마다 별만 보는 천체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별에 대해선 조금 알아. 하지만 ‘나도 속고 싶었어’.

 내가 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왔던 거군.”

 “사랑하는 대상을 모두 알기란 힘들지요.”

 “…그런 거군….”

 그 분께선 씁쓸히 웃으시더니 “아, 그런데 아프리카 내전이랬지?”라고 말씀하셨다.

 “네.”

 이번 라디오 뉴스는 기획특집인 것 같았다.

 교수님께서 입을 여셨다.

 “신이 있다면 ‘전쟁’은 왜 있는 걸까.”

 “신이 없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전혀 상상 외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과학이 그렇듯이.”

 “자네는 인격신을 믿나? 가톨릭처럼?

 아니면 불교처럼 근원을 비인격처럼 생각하나?”

 “인격도 비인격도 믿지 않습니다. 정말로 있다면 우리의 상상에 들어맞지 않을 확률이 큽니다.”

 “어떤?”

 “우리는 신이 있다면 전쟁이 없을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겠지요. 신이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로 있다면 우리 뜻에 맞춰서는 안 되겠지요.

과학자는 진리를 추구하지, 우리의 바람대로 진리를 틀에 짜맞춰서는 안 됩니다.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하며, 그게 진실이라면 자기자신의 편견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한 것이 꼭 자기바램대로만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지, 우리 뜻에 따라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요.”

 “근원. 본체. 핵심.”

 “…-”

 “나는 그걸 원하고 있네.”

 ‘……?’

 “영혼을 알고 싶어.”

 “있다면.”

 “그렇겠지. 보통 이렇게 분류하더군.

 영혼, 정신, 육체.”

 “뭐든지 3가지로 분류하는 게 쉬우니까요.”

 “그래,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하나의 영혼에서 우주를 뿜어냈다면 좋겠네.”

 장난스레 농담을 했다.

 “양자물리학 세미나에서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교수님께서 키득키득 웃으시더니 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답하셨다, “그렇고 말고”.

 저 멀리 커다란 정문이 보였다.

 교수님께서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이제 다 왔군.”

 “그렇네요.”

 ‘…이제 다 온 겁니다….’

 하버드의 정문을 보는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려버렸다.


 나는 교수님을 내려드렸다.

 나도 내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인사를 드렸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차 키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뒤돌아섰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췌장암일세.”

 “……?!”

 당황스러웠다. 혼란스러웠다.

 잠시 동안 믿어지지 않았다.

 오늘 하룻동안 놓쳐왔던 그 무엇이 ‘이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색치 않고 가능하리라 믿기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요즘에 암은 고치기 쉽습니다. 워낙에 기술이 발전해 있기 때문에.

 너무 걱정치 마세요.

 제가 존스홉킨스에 아는 친척이 많습니다.”

 “존스홉킨스? 그 병원도 하지 못할 거야.”

 “……?”

 “암이… 간장, 위장, 대장, 소장, 심지어는 심장까지 퍼져버렸네.

 내가 걸린 암은… 췌장암 뿐만이 아니라, 간암, 위암, 대장암, 소장암, 그리고 심장암인 셈이지.”

 “어떻게….”

 나는 얼떨떨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존스홉킨스라 해도 못 고칠 걸세.

 나는 살아있는 종양이나 마찬가지야.”

 듣고 싶지 않았다.

 멍해서 고개를 숙였다.

 “재웅… 그 동안 고마웠네.”

 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자넨 최고였어.

 내가 이때까지 겪은 최고의 물리학자였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죽어서도.”

 눈물샘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드니 교수님께서 울고 계셨다.

 교수님을 안아버렸다.

 “교수님…

 안 됩니다.

 오래 사셔야죠. 이러시면 안 돼요. 안 돼요. 정말이지 안 돼요.

 존경했습니다.

 …왜 왜… 왜….”

 교수님의 떨림이 느껴졌다.

 “…나도 살고 싶어….

 나도 살고 싶었네.

 하지만… 이제 내 나이도… 이미 죽을 때 아닌가.

 내 나이도 이제 70에 다다랐어.”

 하지만 몸은 떨고 계셨다,

내게 안긴 교수님이 작게 느껴졌다.

말은 속이실 수 있어도… 그 떨리는 목소리와 눈물은 속이실 수 없었다.

 교수님의 아픔이…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 감정의 덩어리들이 내게 속삭였다.

 ‘…아쉽네…. 슬프고 억울하네.

 나는 아직도 삶이 아름답다 느끼는데… 나는 아직도 소년인데… 10대에 맞았던 뺨이 아직도 얼얼한데… 이제 가야 하나….’

내 가슴팍에서 ‘소년’이 울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슬픔이 옆좌석에 앉아 있었고, 아픔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차를 모는 와중에도 계속 눈물을 닦아냈다.

 연구소에 가다 멈추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울었는지 모른다.

 창 밖엔 <코스모스> 꽃으로 가득하였지만, 그것은 기억상에만 존재할 뿐, 나는 울기에 바빴다. 울다 보니, 어딘가 화산이 폭발한데도 알아채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아예 차를 멈추고 두 손으로 눈을 그리고 얼굴을 가려버렸다.

 얼굴을 덮은 두 손에 눈물이 차올라 마치 샘물을 쥐는 것만 같았다.

 교수님이 떠올랐다. 그 분이 우시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온 몸이 눈물로 가득하네. 눈물이 솟아올라서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온 몸이 눈물로 가득한데,

 목과 가슴에 찬 눈물이 솟아올라 눈물샘을 통해 흘러내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재웅이에요?”

 옆 좌석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런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키’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두 손을 풀어버렸다.

by 스물 | 2009/01/13 21:55 | 무의미 농담소설 하버드 | 트랙백 | 덧글(0)

무의미 농담소설 하버드, 1화

 어렸을 때 썼던 글입니다. ^^;
 양자물리학도 나름 열두 살 때쯤부터 관심있었기에 이런 과학쪽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가 봅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를 정말 싫어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이야 살기에도 간당간당하니.
 그리고 실제 제가 정치적으로 일했던 그룹은 타소설의 배경이 되는 있긴 합니다만. 아주 작은 설정만 빌렸기에 거의 다르다 보시면 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글은 거의 '농담'이라 보시면 되고, 저 스스로도 어휴... 빨리 출판해서 자그마한 수익이나 얻어 여생을 조금이라도 빨리 선물준비에 보냈으면 싶기도 합니다.
 어디 그게 뜻대로 되나요.
 방문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쓰는 데에도 하루에 50페이지씩 쓰던 정도라, 크게 생각치 않고 쓴 것이니, 농담이라 받아들여주십시오. 저는 과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과학적인 진술에 대해선 농담이라 받아들여주십시오.
 제가 스스로도 제정신이 아닐듯.
 


『1부 ‘driver's stone’』


 “컴퓨터가 뭐지?”

 “C, o, m, p, u, t, e, r.”
“뜻은?”

 내 질문에 섀라가 노트를 긁적거렸다.

 computing machine이라 적혀 있었다.

 도서관 내부는 하버드대생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이 차야 거의 나지 않는다지만, 교수는 나 밖에 없는듯 했다.

 나는 장난삼아 그 단어 위에 □△○를 덮어 적었다.

 섀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에게 추가질문을 던졌다.

 “그럼 섀라, 넌 연산하는 거라 적었는데,

 우리 뇌와 무슨 차이가 있지?”

 “우리 뇌는 생물적이고, 컴퓨터는 기계적이지.”

 “생물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은,

 물리적으로나 화학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나?”

 “작용을 보자면 크게는 없어.

 하지만 컴퓨터는 물리적이고, 생물은 화학적이지.

 컴퓨터는 전자로 반도체의 배열을 바꾸고, 우리는 화학물질로 뇌의 배열을 바꾸니까.”

 “좋아.”

 “뭐하려고?” “내가 영혼은 없단 걸 증명하겠어.”

 “정말?”

 “응.”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번 주 교회 같이 나가는 거 잊지 마.”

 “그래.”

 나는 웃으면서 그녀와 헤어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로 영혼은 없는 것일까?

 그와 한 계약을 지켜야 하는 걸까?

 나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보았다.

 ‘온 몸이 눈물로 가득차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질문은 ‘내 교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서글픈 마음에 그 분이 쓰신 그 쪽지를 만지작거려보았다.

 강의가 있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가슴이 아파왔다.

 자꾸만.


 색깔은 7가지가 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그래서 스펙트럼의 빨주노초파남보라 부른다.

 빛이 유리를 통과하면 이들은 갈라져버린다.

 나는 요즘 따라 초록을 좋아하게 됐다. 바로 몇 문장 앞에 <초록>이 괄호쳐진 걸로만 봐도 알 수 잇을 것이다. 괄호를 쳤다는 것은 키워드란 뜻이겠지?

 예상이 가듯이, 그렇다, 나는 초록이 좋다.

 그냥 그 자체로 부드러운 게 좋으니까.

 요즘엔 노란색도 무척 좋아졌다.

 따스한 게 좋아진 것이다.

 이 두 색 초록과 노랑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부드럽고 따스한 걸 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초록과 노랑으로부터 각각 그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받아보고 싶어선 아닐까?

 어쩌면

 내가 후에 계약을 맺게 된 이유는,

 단순히 자극된 연구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단순해서,

 단지,

 그녀가 밝은 녹색 눈동자에 금발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satan이란 id.

 MIT의 조교수.

 보자마자 이렇게 느꼇다,

 ‘id의 의미는 마왕. 재미있군.’

 마왕이 내게 물었다.

「영혼이 있겠습니까?」

 나는 대답해주었다.

「알 수 없습니다.

 MIT에선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그는 나를 어떻게 알아냈던 것일까?

 물론 알아낼 방도는 많을 것이다.

 작년엔 2017년 이슈에 뽑히기도 했던 이론물리학자였으니까.

 32세에, 한국출신, 하버드 교수, 올림픽에서 국가대표를 맡았던 이력이 독특하긴 독특했다.

 아직 미국으로 귀화하지도 않아서

 재작년엔 ‘올해의 미국인’에 뽑혔다가 취소되기도 했었다. 워싱턴포스트에 나의 명단이 실렸다가 다음날 삭제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그때 섀라가 말했었지,

 “귀화해둘걸 그랬어, 오빠?”

 “귀찮아.”

 다행히도 다음 해엔 ‘올해의 한국인’에 뽑혔다.

 하지만 내 개인의 문제일 뿐인데 왜 그들이 스스로 나서서 북치고 장구치며 난리굿을 피우며 ‘전세계의 문제’로 만드는 걸까?

 알 수 없다,

 나는 묵묵히 연구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묵묵히 연구하든 말든 언론은 기사거리를 찾아내기에 바쁘므로, 아마 마왕은 그런 난리굿을 보고서야 나를 알아냈을 것이다. 뉴스는 분량을 채워야 하므로, 채울 기사거리가 없던 유명언론에게 나는 맛있는 낚시미끼였을 테니.

 나는 그녀를 생각해서 반문으로 그치지 않고, 하버드의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하버드에선 영혼과 관련된 정규과목이 없습니다.」

 의외로 재미있는 질문이라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답장을 기다렸었다.

 이론물리학 수업이 끝난 오후,

 섀라와 함께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실망한 걸까? 며칠 동안 답장이 오질 않아.”

 “친절한 답변이네. 이해한 걸 거야”라고 섀라가 말했다.

 그 후로도 1주일 동안은 계속 그러하였다.

 내 삶은 평소처럼 진행되어갔다.

 항상 하듯이,

 내 모든 일상은 연구 뿐이었다.

 늘 그렇듯이, 다만, 섀라가 함께 붙어 있어서 심심하진 않았다.

 나이 차이는 딱 11세였지만, 그녀는 내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다.

 그녀를 소개하자면,

 섀라는 독일․프랑스 혼혈로 내 아주 멀디 먼 친척이자, 나로부터 이론물리학 수업을 듣는 문학과 학생이었다.

 붙어 다니는 시간이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길긴 하지만,

 관계를 보자면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나의 사이는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공생관계’였으니까.

 그녀가 가끔 “오빠한테 기생해도 되지?”라고 묻기도 했지만 나도 섀라에게 배우는 게 많았다.

 나는 섀라에게 내 결점과 맹점에 대해 묻곤 하였고, 섀라는 내게서 배워가야 할 것을 모두 배워갔다.

 이러다 보니 나도 별 수 없이 그녀에게만은 A+를 주었다.

 “와… 레포트 빠뜨려 먹었는데도 A+줬던 거야?”

 그녀는 자기성적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어디 서랍에 던져놨던 작년 성적표를 이제야 발견한듯 하였다.

 교수실에 들어온 그녀가 보여준 게 그거였으니까.

 “섀라, 성적푠 작년에 보지 않았어?”

 “아니. 전혀. 왜냐하면 성적에 크게 관심이 없거든.

 그런데 왜 A+를 준 거야?”

 “너만큼 이해하는 애도 없으니까.”

 나는 컴퓨터로 내 우주모형에 대한 논문을 점검하고 있었다.

 “섀라, 우주의 근원적인 요소로는 뭐가 가장 어울릴까?

 독창적인 이론을 만드려면.”

 “딸기. 사과. 호두. 빵. …기독교적인 요소를 넣어서 예수님의 피라든가….

 이러면 독창적일 거야.”

 “심하게 독창적이군.

 이단으로 찍힐 거야.

 하버드대의 전도유망한 과학자가 논문에 대한 스트레스로 정신이 휙 가버렸다고 보겠지.

 애석한 일이야.”

 그런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도 나는 의외로 자극을 받았다.

 의식이 환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종종 우주모형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었다.

 방금의 것도 생각 외로 좋은 답변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섀라가 말했다.

 “괜찮지 않아? 딸기나 사과? 학계에서 단 한 번도 나와본 적이 없는 이론이야.

 설득력도 있어.”

 “설득력? 물질덩어리를 분해하기 시작하면 뭐가 되지?”

 “분자덩어리.”

 “분자 아래는?”

 “원자.”

 “섀라, 그러면 원자 아래는?”

 “원자핵과 전자. 원자핵은 양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지.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맞아. 더 아래로 내려가면 쿼크와 렙톤이 있지? 쿼크의 종류가 6개. 렙톤의 종류가 6개. 이 12개가 우주의 기본이야. 쿼크와 렙톤. 나 같은 교수가 아니라, 전 하버드 학생들이 다 아는 기본 상식일 거야.”

 “쿼크와 렙톤 이하로는 아직 모르지.”

 “그런데 그 쿼크와 렙톤 아래에 사과가 있다고?”

 이겼다 싶어서 보는데,

 되려 그녀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냐.

 2천년 넘게 배우는 그리스 철학이 그렇잖아.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로 봤어.

 사과가 물, 공기, 불보다 못한 게 뭐야?”

 “하지만 근거가 타당해야지?”

 “근거는 타당해.

 알아서 지어내면 아무도 반박치 못할 테니까.

 솔직히 초끈이론이나 하느님이나 반증 안 되긴 마찬가지잖아.”

 말문이 막혔다. 초끈이론은 현대우주모형 중의 하나였는데, 사실 요즘 이론물리학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보니, 가설만 늘어날 뿐, 대부분의 이론들이 ‘입증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섀라가 “나는 독창적인 이론을 말할 뿐이라구”라고 못박아버렸다.

 뭔가 말을 꺼내려 해도 섀라의 논리에 반박당할 걸 생각하니 앞이 막막하여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졌다, 졌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톡톡.’

 “내가 졌….”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내가 졌다’라고 대답하는 것보단 우선 전화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전화를 받자,

 선배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이 말씀하는 걸 귀 기울여 듣다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일단 모니터만 급히 끄고선

 옷걸이에 걸어뒀던 점퍼를 다시 빼냈다.

 섀라가 나가려는 날 향해 말했다.

 “뭐래?”

 “누가 마왕인지 알아내셨대.”

 얼핏 스쳐본 섀라의 표정이 놀라있었다.


 <마왕을 찾아서> 나는 황급히 차를 몰았다.

 “재웅 군,

 거기야. 그런데 마왕이 30분 내로 떠나.”

 ‘거기라니.’

 교수님은 너무 단순히 말씀하시곤 하셨다.

 다만 위치는 대략 예상이 갔다.

 아마 그 스시 집을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양자물리학자인 그 교수님은

 독일계 미국인이셨는데, 묘하게도 f 발음을 조금 별나게 발음하곤 하셨다.

 f 발음 교수님께선 이미 미국인이 되셨고, 사실 사신 기간도 20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그런 저명한 학자가 기본적인 발음을 틀리게 발음한단 것은 아무도 믿지 못했는데, 심지어 내가 본 어떤 독일인조차 그렇게 영어를 하지는 않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교수님이 완벽한 영국 억양을 씀에도 불구하고 f 발음만은 엉터리였단 것이다. 윗니에 아랫입술을 대고 바람을 살짝 불면 대는 f 발음인데, 정말 기묘하게 강세가 들어갔다.

 물론 항상 그렇게 발음하시는 것은 아니었고, 몇 시간마다 한 번쯤 튀어나오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게 너무나 인상적인데다 다들 보고선 잊을 수 없는지라 ‘f 발음 교수님’이란 건 일종의 별명으로 굳어져버렸다.

 왜 그러한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그 분에게는 당연한 이유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영어를 배운 게… 12살 무렵이었네.

 아버지께선 내가 발음을 조금이라도 잘못 하면 매질하셨어.

 그러다 보니 나는 영어에 대한 공포가 생겨버렸고, 강박증이 생겼어.

 틀려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실제로 꼭 몇 가지 발음은 틀려야만 했어. f, t, l 같은 거. 다른 발음을 내는 게 아니라, 발음 할 때에 ‘힘이 들어갔던 거’지.

 뺨을 맞고 걷어차이고, 욕설을 듣고, 매일 같이 독일 패전에 대해서 들어야 했지.”

 내가 그 분 밑에서 하버드대생으로 배울 때에 들은 일이었다, 그때 나는 그 분의 원고교정과 내용감수를 맡고 있었는데, 그 분은 나보다도 더 커피 매니아였기에 그때에도 우리 둘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독일 패전요?”

 커피는 내가 카페 마키아또를 마셨고, 교수님이 카푸치노를 마셨는데, 스페인어․불어․독일어는 중고등학교 때 배워 알아도 이탈리아어는 배우질 못해서 ‘카페 마키아또’의 뜻도 모르고 ‘카푸치노’의 뜻도 몰랐다. 선택해서 마신 게 아니라, 사실 ‘교수님께서 그냥 주는 대로 마신 거’였다.

 “그래, 독일 패전.”

 물론 f 발음 교수님께선 커피를 그냥 주시지도 않으셨고, 내가 그냥 마실 수도 없었다. 예를 들자면, 교수님께서는 ‘이번엔 브라질산이 아니라, 베트남산 커피콩으로 구웠어. 향미가 다를 거야. 약간 강하게 볶았지. 분쇄는 미세하게가 아니라 거칠게 했으니. 거르지도 않았네. 입 안에 감도는 게 또 다를 거야. 좀더 부드럽고 무게감이 있지. 물론 약간 더 밋밋해. 나는 정해진 정량 같은 건 싫어해. 거칠게 만들어진 것도 꽤나 좋거든? 음식 같은 것만 해도, 약간 타거나 약간 졸인 것도 적당하면 오히려 전보다 더 신선한 느낌이기도 하니까. 공 군도 거칠게 만들어진 카페 마키아또를 마셔보게”라는 식으로 새로운 커피를 권하곤 하셨고,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책상을 정리하며 “알겠습니다. 베트남산 원두를 강하게 볶아서 거칠게 간 카페 마키아토라… 기대되네요’라는 식으로 대답하곤 하였다.

 “교수님, 독일패전이라면 교수님과 무슨 관계인 겁니까?”

 아들이 발음을 잘못했을 뿐인데 독일 패전 얘기를 꺼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독일 패전과 교수님이 무슨 관계인 건지…? 말씀하신 내용을 잘 모르겠습니다.”

 독일패전과 교수님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내가 느꼈던 것은 ‘커피가 참 달콤한 음료란 것’이었다.

 특히, 카페 마키아또는 커피가 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다른 커피보다 농도가 진한 느낌이었다.

 교수님의 일을 도우면서 쉬는 시간엔 늘 커피를 함께 들었기에 커피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차츰차츰 늘어갔다.

 일조량, 토양, 국가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원두의 맛이라든가, 맛의 시고 쓴 맛을 결정하는 볶는 과정, 입 속에서 맴도는 감도를 만드는 가는 과정, 커피의 맛을 좌우하는 커피액 추출과정, 후에 들어가는 크림이나 향료, 같은 것은ㅡ… 그야말로 교수님께 모두 배우고 배우고 배웠고,

 날마다 새로 배우다 보니 나름 소양이 생기긴 했으나,

 ‘이건 커피군’,

 하고 생각하며 마시는 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버지께선 2차 대전에 독일 장교셨으니까.

 물론 A급 전범이라든가 B급 전범이라든가 하는 분은 아니셨어.

 아버지는 그런 계통의 일은 한 것은 아니셨으니까.

 하지만 나는 생일이 5월 7일이었거든?”

 ‘아… 독일 패전일이셨군.’

 “물론 가르치신 이유는 아버지께선 독일이 진 원인이 미국과 영국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이셨겠지. 영어는 미국과 영국을 알기엔 제격인 언어였으니까. 하지만 ‘독일인 중에서도 그렇게 별난 독일인은 없었을 거야’. ‘정신병자’셨지. 거기에다 아버지는 은연 중에 ‘독일이 패전한 데에 대해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

 나는 2년 뒤에 태어났는데도 말이야.

 패전이 1945년이었고, 난 47년에 태어났는데, 생일 때문에 이상한 관계가 만들어진 거지.

 아무 상관 없는데도,

 정신적으론 내게 연관이 지어지는 거지.”

 인간은 그 모든 것을 기호와 의미로 분석한다.

 아마 5월 7일은 그 젊은 장교에게 좌절과 패배로 얼룩진 불길한 의미였을 것이다. ㅡ 대부분의 인류에게 승리의 날이었겠지만.

 하지만 그런 콤플렉스라면 나도 하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예이다,

 그 분께서 어리셨을 때의 이야기인 셈이다.

 교수님께선 2차 대전으로부터 2년 뒤에 태어나셨지만, 아버지께서는 한국전으로부터 2년 뒤에 태어나셨다.

 한국전은 2차 대전 이후로 가장 규모가 컸던 전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하여 힘을 겨룬 유일한 전쟁이다. 공산주의의 축으로는 러시아와 중국이 축을 이루어 주변 국가를 끌어들였고, 민주주의의 축으로는 미국과 일본이 축을 이루어 주변 국가를 끌어들였다.

 3백만 명이라는 사상자를 낳고서,

 공산주의 노선인 북쪽은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가 되고, 민주주의 노선인 남쪽은 ‘대한’ 민주주의공화국이 되었다.

 공산주의였던 북한은 일본이 지은 공장단지로 가득한데다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으로 인해 상당히 부유한 국가였다. 그에 비해 민주주의였던 남한은 논밭 밖에 없었고 생산시설이 전무했다.

 북한이 공격한 것은 계산적인 입장에서 봤을 땐 승기가 확실했다. 북한인이 소득도 더 높고, 병력도 더 많으며, 무기를 비롯해 그 모든 전투병기들이 더 강력하고 더 많았다. 거기에다가, 아군인 러시아와 중국은 바로 옆에 붙어 있고, 미국은 저 멀찍이에 떨어져 있었다. 적화노선을 바랬던 북한의 공격은 당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산주의 국가는 대개가 폭력적이었다. 아름다운 이론과 달리 현실 속의 공산주의는 하층의 불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이미 러시아에서의 발생부터가 폭력적인 데에 있었으니까.

 북한의 공격은 남한을 거의 초토화시켰고,

 남한은 겨우겨우 북한으로부터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다.

 남한은 북한을 증오하게 되었지만, 이미 파산할 지경이라 어떻게 복수할 수조차 없었다. 겨우겨우 미국의 원조로 죽다 말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전쟁잔해와 부서진 건물로 가득한 한국에서 아버지께서 태어나셨다.

 그 후 시간순서를 생략하겠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이기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늘상 폭력적이었고, 지극히 자기자신만 아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에 전교1등을 하지 못했단 이유로 ‘유급당하셨으니’. 할아버지께서는 아들이 학년을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평생의 상처가 따라다닌 걸 생각하면,

 f 발음 교수님의 경우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기어 브레이크를 걸었다.

 차문을 열자,

 네온사인으로 된 일어 간판이 보였다.

 들어가자,

 안정된 분위기에 오밀조밀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스시 가게였다.

 실은 이 스시가게는

 예전에 왔었던 그곳으로, 주인은 진짜 일본인이었다.

 f 발음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이유는 주인이 일본인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일본인이 하든 미국인이 하든 사실 프랑스인이 하든 맛의 차이가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일본인이 직접 스시를 만드니까 뭔가 모르게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굘 해보면, 똑같이 학교 나와 똑같이 사회생활하다가 똑같이 요리학원에 들어가 배웠을 텐데, 뭔가 스시는 일본인이 한 게 아니면 느낌이 살질 않아”,

 라고 교수님께 듣곤 하였다, 그것도 ‘강의 수업에서’.

 ‘양자’물리학 강의였지만, 클래스메이트들은 그 강의를 ‘요리’물리학이라 부르곤 하였다. 실제로 그 분은 강의하실 때에도 요리와 관련된 방식으로 강의하는 걸 좋아하셨다.

 물론 그때와 달리,

 f 발음 교수님은 더 이상은 강단에 계시지 않으셨다.

 공식 석상에선

 이미 퇴임하신 분이니까.

 내가 들어가자,

 주인이 인사를 하였다.

 꽤나 자주 왔었다.

 “어휴- 몇 년만에 오시나요?”

 “그 동안 바빠서요.”

 하지만 교수님이 ‘거기’라고 말씀하시는 곳은 이곳 외에 없었다.

 그 분의 언어 스타일 자체가 원래 그랬으니까.

 ‘그 사람’은 보통 조교수를 가리켰고, ‘졸부’는 재단을 가리켰다.

 ‘깡패’라고 하면 대개 미국 내지 중국을 가리켰고, ‘마시자’고 하실 땐 반드시 커피였다.

 알아서만 들으면 됐다.

 “그리고 이젠 저도 교숩니다. 하버드에 사람이 없어서 그냥 채용이 돼버렸네요.”

 “아… 벌써 그렇게 되셨습니까.”

 나는 주인께 눈짓을 했다.

 “아… 교수님께선 끝자리에 계십니다.”

 그가 가리키는 손 끝은 벽가의 테이블을 가리켰는데, 일본전통회화로 그려진 풍경화 아래로 늙은 노신사와 선이 부드러운 아가씨가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지긋한 흰 머리에 큰 체구, 인자한 표정이었는데, 바로 f 교수님이셨고,

 다른 한 아가씨는 검은 머리칼의 동양계 여성이었다.

 내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교수님의 친손녀였다. 다만, 독일계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교수님과 달리 거의 순수 일본인으로 보였다.

 약간 서양적인 얼굴 형태가 남아 있었지만, 동양적인 귀엽고 자그마한 느낌에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아가씨였다.

 동양적인 선이 매우 부드럽고 고왔다.

 하지만,

 ‘마왕?’

 설마 싶었다.

 마왕이라면 키가 한 195cm에 덩치가 매우 크고 왠지 흑발을 묶은듯한 남자일 것 같았다. 나도 중학교 무렵부터 183cm이라 키가 큰 편이지만, 마왕은 적어도 180대보단 훨씬 커야 할듯 했다. 뭔가 일반사람이 아닌듯한 ‘위압감’이 있어야 하니까. 피부는 매우 하얗고 조금은 어둡고 푸른 느낌이 감도는 회색 느낌을 상상했는데, 그녀는 뺨이 밝그레서 복숭아빛이었다.

 이래선 매치가 되질 않았다. 저 아가씨도 MIT의 조교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니길 바랬다.

 ‘환상’이 깨지는 셈이니까.

 멀리서 교수님께서 손을 흔드셨다.

 나는 살짝 머리를 숙여 그 인사에 응답하곤 무슨 얘길 할지 떠올리며 교수님께로 걸음을 옮겼다.

 교수님과 손녀딸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안쪽인 벽가에 앉으셨고 손녀딸인 지나 양이 바깥쪽에 앉아 있었다.

 ‘좋은 데 앉으셨네.’

 등과 측편이 채워지면 확실히 사람은 안정이 된다.

 “교수님, 말썽쟁이 제자가 왔습니다.”

 그 분이 키득키득 웃으셨다.

 “논문받어.

 논문에 고마워하는 사람으로 내 이름 넣었더군.”

 “저 아니면 누가 또 우리 교수님을 적어드리겠습니까.”

 물을 한 컵 마시더니, 교수님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지 속으로 킥킥거리셨다.

 테이블 위의 티슈로 입가를 살짝 닦으시더니 앞을 손으로 가리키셨다.

 “알지? 지나는? 저번에 한번 만났었잖아?”

 “예, 압니다.

 안녕하세요, 지나 양?”

 “지나, 여긴 하버드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교수일세. ”

 “안녕하세요, 재웅 씨. 성이 공이었죠?”

 “예.”

 “할아버지께서 혼자 있을 땐 이름하고 성이 자주 바뀌어요. 교수님을 재웅이라 불렀다가 공이라 불렀다가.”

 “아, 그건 압니다. 예전에 일을 오랫동안 같이 할 때 자주 그러셨어요.

 요즘엔 조금 의식하셔서 그런 일 없겠지만. 이름이 익숙치 않으셨던지 성과 이름이 반쯤 섞여져 불린 적도 있습니다.”

 지나가 웃음을 지었다.

 반가운 아가씨였다.

 교수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론 두 번인가 더 만났었다.

 물론 그건 단순히 논문 문제 때문이었다.

 지나가 내게 물었다.

 “잘 써져가요?”

 “그럭저럭.”

 그녀는 작은 체구였지만, 건물로 치면 인테리어가 잘돼 있어 뭔가 공간이 꽉차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왜일까 하니 색감을 잘 쓴 것 같단 결론이 났다. 색깔은 자신이 들어간 ‘공간’이나 ‘물체’의 이미지를 바꿔버리니까.

 그만큼 그녀라는 자체적인 색감은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내게 논문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6개국어자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른다.

 다솔이 이후로 그렇게 내게 새로운 인식을 준 사람이 딱히 없었으니까.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왕이라면 실망할 거야.

 지나 양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마왕에 대한 실망이겠지.

 마왕은 좀더 인상적이어야 해.’

 생각을 마치고서 자리를 살폈다.

 생각해보니 어디에 앉을까 했다.

 조금 난처해서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교수님께서 내 표정을 읽으시더니 킥킥 웃으셨다.

 “그러고 보니 하늘 같은 교수와 낯설은 아가씨가 있군!

 누굴 선택할 건가!”

 “예쁜 여자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만은 실례겠군요.”

 그래서 교수님 옆에 앉으려 몸을 옮겼다.

 하지만 이게 웬걸?

 교수님께서 나를 밀어내셨다,

 “예쁜 여자 옆에 앉게. 중늙은이 옆에 앉지 말고. 아직도 숫기가 없나?

 아직도 여학생들 앞에서 빨개지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숫기가 아니라, 예의의 문제죠.”

 하지만 지나 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옆에 앉았다.

 교수님께서 웃으시더니

 “지나가 묻더군. 자네 정체가 뭔가?”,

 라고 말씀하셨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국적?”

 “정체성을 말하는 거지. 그렇다면 국적도 포함되겠지?

 자네는 뭐든지 부정을 해.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지.”

 “아닌 걸 물으시니까요.”

 교수님께서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럼 맞는 걸 말해보게.”

 “혈통 문제나 국적 문제로가면 저는 복잡해질 겁니다. 단일 인자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세계인이라 말하면 편할 겁니다.

 국적은 아직 옮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살아보지도 않은 국가의 혈통은 크게 중요치 않으니, 그냥 한국인 아니겠습니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게 있다면 한국인으로서 살아왔으니, 한국인 아니겠습니까.

 혈통, 국가, 출생보다 중요한 건 살아온 경험 아니겠습니까.”

 지나 양을 바라보았다.

 지나 양이 나와 교수님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미국인이에요.”

 교수님께서는 지나 양의 귀에 손을 대며 속삭이듯이 장난치셨다.

 “나는 비밀이지만…

 ‘독일인’이야.’

 다 들리게 속삭이시는 모습이 꼭 장난꾸러기 같으셨다.

 “저도 비밀이지만, 실은 ‘하버드인’입니다.”

 교수님께서 키득키득 웃으셨다.

 교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즐기셨다.

 교수님은 아버지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존경하니까. 만약 내가 하버드 교수를 때려치우고 오직 글만을 쓴다면, 그 어떤 글에라도 아버지가 등장하리라 생각한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이름과 모습까지 달라졌다 해도, 아버지께서 모습을 바꿔 내 곁에 계셔주기를 바라겠지.

 그만큼 교수님을 존경했다

 이 분은 하버드의 빛이니까.

 교수님께서 장난스레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셨다.

 “기억나나?

 내가 자네에게 물었던 첫질문?”

 “…그런 것도 기억하십니까….

 그다지 특별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네에게 이렇게 물었지. ‘만약 자네가 나와 같이 하버드대 교수고,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교과서를 써야 한다 치게. 그렇다면 외우기 어려운 것들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과연 일반인들이 양자물리학을 쉽게 배울 수 있을까?’

 기억하나?”

 “아… 기억합니다.

 그때 다섯 시간 연강을 하셨지요.

 커리큘럼상으론 2시간 연강이었는데.”

 “자넨 뭐뭐 빠졌었지?”

 “경제학 수업, 사회학 수업, 그리고 러시아어 수업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웃음이 더 커지셨다.

 “미안해지는구만!”

 귀밑머리를 긁적였다,

 “그 날 정규신청된 과목은 어차피 물리학 수업이 다였습니다.”

 교수님이 웃음을 터뜨리셨다.

 “맞아맞아, 내 기억으로도 자네는 별 희한한 것까지 수업을 다 참석했었지!

 학점도 안 나오는데 별의별 거까지 다 들어갔었어. 문제는 ‘하버드 교수들이 열성적인 학생이 수업에 참석하는 걸 감지하고서 기뻐했지만’ ‘출석부에 없는 학생이란 걸’ 알게 되고, 결국 모두 실망했었단 거지’.

 그렇게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컸었나?”

 “하버드에 왜 오려 했겠습니까. 그런 일은 한국에서도 있었으니 별 문제도 아닙니다, 제 수업 아닌 데로 마구마구 들어갔으니까요.”

 “하긴 자네 성격이 별나지.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딱히 여기 외엔 배울 곳도 없다 느꼈습니다.”

 f 발음 교수님은 고개를 내저으며 “별종이야, 별종”이라 말하셨다.

 지나 양이 웃더니 “교재는 어려웠죠?”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하버드에서 배운다는 교재들을 모두 봤을 땐 충격을 받았습니다.”

 “놀라서?”

 그녀의 표정이 묘하였다.

 “‘어지간한 게으름뱅이가 아니라면 이런 걸 4년이나 늘려 배운단 거야?’라고 생각했었죠.”

 교수님이 물을 마시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셨다.

by 스물 | 2009/01/13 15:25 | 무의미 농담소설 하버드 | 트랙백 | 덧글(0)

6화, 영의 구원

 6화, 영의 구원 - 그의 시점


 그녀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이미 악에 물들어 있는데다, 추악하고, 사실 더러운데다, 덜떨어지고, 의심과 망상에 더더욱이 거의 붕붕 떠 있는 유령과 같고, 영과 혼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조차, 예상조차 하겠습니까?

 더더욱이 영의 흐름마저 타지 못 하고, 내 스스로 영이 펼쳐진 존재가 되지 못하는… 이른바 영조차 없는… 그런 몸의 상태가…,

 누구의 상태인지 압니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영의 흐름조차 타지 못하며, 나는 영의 흐름을 담아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마치 기계를 이루는 전기 회로와 같이, 회로, 영의 흐름을 담아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의미일 텐데… 나는 지금 영의 흐름조차 감지하지 못하여…

 나는 지금 육체만 남아.

 고통스러워 그녀에게 말하였다.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빨리 벌어서 해야 할 것을 모두 마쳐요.”

 나는 나 스스로 이런 미치광이 행동을 되풀이했단 것에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보고 미쳤다고 소리쳐댔다.

 나는 내 스스로 고통스러웠다.

 내겐 아무런 길조차 없는듯 했다.

 과연 이 따위 돈으로 내가 세상에 잘못한 것들을 갚을 수 있단 것인가? 혹은 내가 갚는다고 해서 갚았는데, 정작 갚고자 했던 이들이 내게 이미 나도 모르는 일을 해왔다면?

 나는 망상에 젖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내가 휘청이듯 몸을 가누지 못하다 소파에 몸을 기대자,

 그녀가 말했다.

 “마음을 가라앉혀요. 당신의 가슴엔 사랑이 필요해요. 영은 지금 잊어요. 사랑이라도 기억해네요.”

 “사랑? 제게 사랑이 가능하다구요? 저 같은 이에게 사랑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며칠 뒤에 죽게 생겼는데 사랑을 하란 말입니까?

 차라리 돈을 벌라 말하세요!

 돈을 벌어서 다른 이들에게 주고 갈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따위 사업을 벌린 것 아닙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주위에서 수군수군거렸다.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가 계세요. 제가 가져갈게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 한 뼘쯤 되는 갈색 종이컵에 두 잔의 카푸치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와 같은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폐기물이라도 그녀에게 가까워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여름에 태어났어요. 초여름.”

 “저는 7월입니다.”

 “그래요? 저는 5월 20일.”

 “봄이잖아요.”

 “아뇨. 계절의 구분은 조금 애매하니까… 저는 여름이 봄보다 더 좋거든요.

 말해봐요, 얼마를 더 살아요?”

 “모두가 거짓말하는 것 다 압니다. 진짜 진심이라면 다르게 행동하겠지요.

 기껏해야 쳐내기 위해 둘러대는 말입니다.

 전 몇 개월 살지 모릅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한 3개월쯤 사나요?”

 “…그쯤이나….”

 그녀의 표정이 조금 슬픈듯 그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렇게 오래는.

 오래 살면 좋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단기간이라도 돈을 어서 벌어야 합니다.”

 “누굴 위해서?”

 “있어요, 누굴 위해서. 그러니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녀가 허밍을 하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노래였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무슨 노래죠?”

 “…동요예요….”

 “가사와 제목을 말해줘요.”

 “둘 다 몰라요. 그래서 허밍 밖에 할 수 없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말하였다.

 “영이 있든 없든 영은 구원받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더 큰 존재에게 의지하여.

 비록 있든 없든…

 몸이라도… 상징적이든 실질적이든… 구원은 받을 수 있다고 믿어요.”

 “…상징적이라도 구원받는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불가능…이랄까,

 없는 영이 어떻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도로를 향했다.

 “차 많죠?”

 “그렇네요.”

 “하지만 제 차는 한 대도 없네요.”

 “물론.”

 “잠시라도…

 제게 당신을 보여주세요.”

 “영도… 사랑도… 그래서 혼과 생명…

 그래요, 영, 영의 흐름, 영의 펼쳐짐, 빛에서부터 육체까지…,

 하지만 제겐 육체가…

 뭘 말해야겠어요?

 저는 완벽히 말해드릴 수 없어요.

 자신없거든요.

 제겐 육체와 머리 뿐…,

 무얼 보여드려요.”

 “…그런가….”

 “돈을 벌어야 해요. 빨리. 어서. 시간을 채워야 해요. 그래야 해결할 수 있어요.”

 “해야 할 게 있군요.”

 “지금은 오직 그것만이 제 목표예요.

 비록 영의 흐름… 그것은 추억이 되고, 영의 흐름을 타서 하나의 존재를 탄생시키는… 그러한 것은 이제 가능은 커녕… 제게 영조차… 하지만…

 이렇게 문장 하나 완성치 못할 만큼 모든 게 불투명해졌데도…

 그 목표만은 분명해요.

 제게 손에 잡히는 목표가 있어요.”

 “자비로운 스승께 바치세요. 분명히 답이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불확실합니다. 제가 지은 게 많달까. 저도 받은 게 많달까.

 그냥 저로선 제 목표만 이루고 홀홀히 떠날 수 밖에 없다 믿습니다.”

 “기한은?”

 “한 달 내로 모든 걸 다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어요, …나를 제외하더라도.”

 “왜죠?”

 “나는 그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 세상에 남기가…

 당신을 보는 게…

 힘들…,

 아, 정말 문장 하나 만들기도 힘들군요.”

 그녀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했다.

 “계속 걸어요.

 얼마쯤 번다면 안심하시겠어요?”

 “백 억.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주 자그마한 돈이라도 벌어서 해결해야 할 겁니다.

 원래 몇 조 정도는 벌어야 제 일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몇 십조, 몇 백조라도.”

 “몇 조라… 몇 년 정도면 벌 수 있겠지요? 몇 십조, 몇 백조라도?”

 “…한 달 내론 무리지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단기간에 모아서 목표를 이루겠단 거지요?”

 “단기간 밖에 남은 시간이…, 그렇잖아요.”

 “그렇네요. 남은 시간이 단기간이었군요.”

 “영의 구원은 모르겠고, 저는….”

 그녀의 입맞춤이 코에 닿았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멀어지며, 그녀가 말했다.

 “원래 이마에 맞추려 했어요. 위안이 되라고.

 하지만 키 차이가….”

 잠시나마,

 영의 구원을 잊었다.

 고마웠다.

 이게 사랑이구나… 싶었다.

 ‘아…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녀가 말했다.

 “영의 구원은 잊지 말아요.

 하지만….”

 그녀가 내 목을 끌어안았다.

 이마에 그녀의 입술이 닿았다.

 ‘…영의 구원….’


 …사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날의 정식계약은 한 시간 뒤로 미뤄졌다.

by 스물 | 2009/01/13 08:11 | 자서전에서 소설화로 | 트랙백 | 덧글(0)

5화, 시체의 밤

 

 5화, 시체의 밤


 “나는 요즘 따라 저를 걸어다니는 시체처럼 느낍니다.

 그게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지요.”

 나는 그녀를 여기에서 보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녀는 삼촌이 절을 맡고 있었다.

 기억 속에도 크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절이었으니까.

 그녀는 스스로 조금 무형적인 것을 본다고 말하였다.

 나를 응시하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냥 모른 척 하였다.

 그녀가 말하였다.

 “영, 영의 흐름, 영이 퍼져, 빛, 사랑, 생명이 탄생하죠. 우주. 당신이 우주에 선물하는 것은 세상을 통해서 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저란 인간은 이제 세상에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물질만이라도 충분히 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그렇지요.”

 그녀가 내준 차를 마시다 맛이 너무 연해 의아하였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뜨거운 걸 많이 드세요.”

 “…….”

 “차는 신경이 곤두설지도 모르잖아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질문을 하려 하였다.

 “…제가 다시 삶을 되찾을 수… 그렇지, 없지 않겠습니까. 몸뚱아리만 남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언제쯤까지 있으실 겁니까?”

 “삼촌이 여럿 계세요. 당신이 만난다는 그 부호가 제 삼촌 중 한 분이시죠.”

 나는 납득했다.

 그때도 정치에 대한 건으로 그녀를 방문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하지만 허사였다.

 나는 살 수 있는 것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희망을 버린 상태였다.

 살아서 선물할 수 있는 것으로 족했다.

 내 말을 누가 믿어줄 것인가.

 아무도.


 나는 일어섰다.

 “환상에 모두 빼앗겼습니다. 제겐 어느 것도. 다만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이 조금 있고. 그 선에서라도 다할 수 있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말을 흐렸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조금 있다 카페에나 가요.”

 나는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영. 영이 흐르고, 영이 퍼져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 영이 펼쳐진다….’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우선 돈이 급했다.

 문밖에 서 있던 택민 씨가 나를 보더니 ‘그 정치가의 키가 크더군요’라고 말하였다.

 “얼마쯤?”

 “190cm?”

 “아. 저보다 7cm크네요. 무서운걸.”

 택민 씨가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모처럼이었다.


 의뢰자와의 대면.

 그가 한 말은 표면적이었다.

 나는 직설적이었다.

 그로 인해 질질 끌리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바로 말하고 바로 듣기를 좋아했다.

 조금 인내가 필요했지만,

 협상은 그가 지정한 호텔에서 하기로 했고,

 그가 원하는 지역과 그 지역에 대한 그 자신의 판단을 들었다.

 나는 그 지역의 데이터 분석에 대한 자료를 그에게 펼쳐주었고,

 내가 잠시 숨을 돌릴 사이, 택민 씨가 해설하였다.

 그리고 헤어졌다.

 몇 시간 뒤 그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사무실을 원했지만, 그 스스로 호텔을 원했다.


 택민 씨가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가 그녀와 카페에 들어가자, 그는 나를 보더니 ‘제 시간 맞추십시오’라 말을 짧게 끊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더니 내게 말하였다.

 “요즘 상황이 좋지 않네요. 통 불경기야.”

 “마치 장사라도 하는 중년이 하는 말 같은데요?”

 “그렇죠?”

 “예.”

 그녀가 잠시 나를 올려다보더니 “영에 대해서 하는 말이에요”라며 뜸을 들였다.

 나는 침묵했다.

 나 스스로 망상과 의심에 사로잡힌 것인지 나조차 판단이 가질 못했다.

 영에 대한 가르침이 기억났다. 자애로운 스승. 그때 이후로, 어떻게 될진 나도 몰랐다. 나는 판단에 의존했다. 그리고 내 판단이 정확해질수록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

 그녀가 나를 향해 말했다.

 “영, 영의 흐름, 영의 펼쳐짐, 그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를 다스리는 왕.”

 “영의 아버지. 하느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죠. 제가 하는 말은 진실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냥 물어볼까 해서 그래요.

 하느님께서 계시고, 다른 사람이 대리를 하기로 했는데, 만약 그 대리를 하기로 한 사람이 조건을 충족치 못하게 된 거예요.

 그럼 무얼 해야 할까요?”

 “용서를 구해야 합니까?”

 “세상에 대한 일을 열심히 하는 거죠. 하느님께 맡기고.”

 “…그럼 다 해결 됩니까…?”

 “그럴 거예요.”

 “그런 얘길 왜 제게 하는 거죠?”

 “당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래요.”

 “…….”

 하지만 내가 얼마 살지 나는 감조차 잡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이제 몸 밖에 없어요. 몸. 오직 몸.”

 “용서를 청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요.”

 “해봤지만 안 됐어요. 그리고 오랫동안 제 잘못을 지적받지 못했어요. 어쩌면 저 스스로 의심이 가요. 이제 말로 해결되긴 무리일 것 같아요. 미안해요.

 저는 돈을 벌어서 제 마지막 선물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도 알다시피 미치광이에 불과하니까요. 단 몇 개월간 그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정확히는 그 사이사이 며칠로 인해. 후회해도 이제 시간을 바꿀 순 없죠.

 제 힘은 너무나 미약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잘해준 사람들에겐 은혜를 갚아주세요.”

 “그럴 겁니다.

 그러려고 지금 이렇게 벌려는 겁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재웅씨.”

 갑자기 호흡이 느려졌다.

 “네.”

 말하는 와중에도 더욱 느려졌다.

 “뭘 마시겠어요? 재웅씨?”

  그녀의 눈을 응시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을 보다

 나도 모르게 검은 환영이 보였다.

 그녀의 동공에 비쳐,

 내 내면으로부터 그림자들이 나와 나를 뒤덮는 광경이었다.

 “…카푸치노….”

 나도 모르게 답을 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통제할 수 없이 그림자가 가슴을 뒤덮었다.

by 스물 | 2009/01/13 06:25 | 자서전에서 소설화로 | 트랙백 | 덧글(0)

악의 축은 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악의 축은 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닐까요?

 원래 악의 축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지명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조크로 미국이 요즘 찍힌 형편입니다만,

 사실 각 시대마다의 윤리기준에 비하면 미국은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대표하는 국가로서 기능 자체는 꽤 훌륭한 편입니다. 미국 이전에 그만큼 세계를 위한 명분으로 시장에서 희생을 자처하는 국가도 없었으니까요.

 물론 골목대장이자 깡패국가로서의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국을 보면,

 2차 세계대전 때의 유태인에 대해 온갖 항변을 하면서도,

 지금 이러한 짓을 저지르는 유태인들을 보면, 우스꽝스럽습니다.

 무엇이 진짜일까요?

 과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 해당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00325035&code=970209 >

 유태인 학살에 대해 그렇게 세계를 곤두세웠던 이스라엘도
 정작 샌드위치나 먹으며 전쟁구경을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이 '몇 세기'간 식민지를 꾸리며 일을 꾸몄던 것은 '그것은 그것'이며,
 정작 세계대전에서 '몇 개월' 내지 '몇년' 독일에게 당했던 것은 영화로 아름답게 '추한 진실'로 드러내는 기법.

 재미있는 댓글 바랍니다.

by 스물 | 2009/01/13 04:06 | 여러분의 댓글 바랍니다 | 트랙백 | 덧글(4)

4화, 강 건너에서

 

 4화, 강 건너에서


 나는 죽음의 강 너머를 보고 있었다.

 멍해 있었다.

 죽음의 사자들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실 겁니까?”

 “아뇨. 아직 갚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마저 마치고 가더라도 가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깨어나고서

 나는 황급히 공항을 떠올렸다.

 7시.

 침대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양복으로 갈아입고, 집 문을 열고 숨을 차듯 나왔다.

 집에서 나왔을 때 이미 주현 씨가 내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차는 주현 씨의 것을 빌렸다.

 타면서 말했다.

 “람보르기니 사의 차면 몇 억은 거뜬히 넘을 거라 생각하니 타는 게 불편하네요.”

 “그래요?”

 그녀가 몰아주는 것을 타는데,

 나는 노트북으로 정리된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도 한 대 있어요. 길쭉하고 멋있잖아요. ‘0.1’%의 차라며 아버지께서 좋아하세요.”

 사실 나는 이런 차를 싫어했다.


 람보르기니의 속도가 놀라운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주행속도를 정확히 맞추며 최대속도를 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단순히 시간감각에 예민했는지, 내가 가서 대기하기에 시간이 넉넉해져버렸다.

 이번 일본행엔 택민 씨가 동행하기로 하였다.

 다른 팀원들은 나보다 3일 먼저 가 있었다.

 그리고 미리 어떻게 회의할지 그쪽 측과 말까지 다 맞춘 상황이었다.

 비공식적으로 다 끝났으니,

 공식적으로 ‘해야 할 말만 내가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다 마련해둔 테이블이었다.

 “회사엔 어떻게 말하지?”

 내 말에 택민 씨가 “알아서 말해두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 말입니다, 그 우리가 해오던 다른 프로젝트들은 어떻게 돼갑니까?”

 택민 씨가 잡지를 읽으며 말하였다.

 “교환해두기로 했습니다.”

 팀들끼리도 각 팀마다 일에 있어 공백기가 있었기에 간혹 그런 게 있었다.

 “네.”

 주현 씨는 따라오지 않았다.

 인사를 마치고 헤어진 나는 무겁게 걸음을 옮기니,

 벌써 언젠가 나는 비행기를 타 있었고, 내가 탄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하늘, 땅, 바다,

 입으로 중얼거렸다.

 택민 씨가 말했다.

 “주무세요, 졸려 보이시네요.”

 “예.”

 이번 생에 너무 실수한 게 많다.

 빨리 벌어서 뭔가 처리를 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했다.


 차가 왔다. 나름 부호라 들었다.

 자산이 200억엔이 넘는다 하니 괜찮다 여겼다.

 2천억원 정도면 크게 많지도 않고 적당했다.

 잠시 잠들었는데 깨고 보니 택민 씨가 내 인쇄된 회의내용을 정돈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빨리 돈 벌어야겠어요.”

 “왜요?”

 “제 개인이 100억쯤 벌어서 1억쯤 나눠줘야 하지 않겠어요?”

 택민 씨가 가만히 있었다.

 택민 씨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택민 씨는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늘 조금 그랬지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너무나도 미치광이에 못난이에 이러한 자도 없고, 모든 이들에게 욕을 먹는 처지라, 정말 20년간 어느 것 하나 어기지 않다 공포와 불안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단 걸 상기하니, 나는 역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어요. 죽어도 회한이 없게 모든 걸 해결하고 떠날 겁니다. 비록 이 육체만 남았더래도.”

 택민 씨가 고갤 끄덕였다.


 일본식 정원에 집은 꽤 넓었다.

 일본쪽의 대부호는 사실 이러한 정원의 집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가쪽에야 조금 이러한 양식의 집과 비슷한 흐름이 있곤 한데, 대외적인 눈도 있거니와, 그들 스스로의 취향이기도 하다.

 자주 왔었다.

 나 스스로도.

 아버지께서도 사실 일본정치계와 젊어서부터 왕래하셨기에 크게 모를 바도 없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직원들이 아는 것도 오래 전까지 거슬러가는 것이 아니기에 나만큼 알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안내를 따라 갔다.

 이리 넓은 집에도 크게 관리인은 많지 않다.

 대개가 그렇듯이.

 나는 중얼거렸다.

 “…비슷한 데를 온 적이 있는데….”


 기억이 가물거렸다.

 여기보다 좀 더 컸고, 일본고전풍이 훨씬 심하였다.

 어렸을 때라 사실 나도 잘 기억나질 않았다.

 여자애가 예뻤었던 것으로 기억났다.

 그 여자애는 내가 이리도 젊은 스물 무렵에 남은 여생이 이렇게 변하리라 미리 알았을까? 몰랐을 것이다.

 이리 되는 것, 아…, 나는 소중한 이들의 조언을 들었어야 했다.

 아쉽게도 나는 늘 불운이 그치질 않았고,

 그때에도 그치질 않았으며, 사실 행운이나 운수 내지는 용서는 내게 있어 사치였다.

 ‘…얼마 살 수 있을까….

 문득 그 여자앨 보고 싶다.’


 우릴 이끄는 여성이 자그맣게 주인에 대해 설명하며 주인어르신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다며 사근사근 말을 베풀었다.

 보폭이 좁고 빨라 우릴 부른 의뢰인의 마음이 급한듯 했다.


 그 여자애가 다시 떠올랐다.

 일본집의 2층은 낮고, 자그마한 계단을 통하는데, 그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아늑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나는 그곳을 오가다 자주 천장에 머리가 부딪치곤 했는데, 그 여자애는 그걸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곤 했다.

 쾌활하고 사교적이었다.


 나는 그녀를 따르던 걸음을 멈추었다.

 옆으로 고갤 돌렸다.

 저 멀리 분수대.

 …그녀였다.


 분수대 너머에 그녀가 있었다.

by 스물 | 2009/01/13 03:38 | 자서전에서 소설화로 | 트랙백 | 덧글(0)

3화, 악몽화

 

 나는 나도 모르게 악몽을 꾸었다.

 이제 내게 영이 있는가?

 나는 그저 웃을 뿐.

 몸뚱아리만이 내 곁에 있다.

 이제 내 잘못을 갚기 위해 돈을 벌고자 한다.

 물론 내가 잘못한 이‘들에게만’.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이들,

 혹은 내가 잘못했지만, 내게 수십 배로 갚은 이들은 제외한다. 내가 잘못했지만, 내게서 수백 배를 뺏어간 이들 또한 제외한다. 하지만 내가 잘못하기만 한 이들에겐 모두 갚아야 한다. 정말 모두 갚을 것이다. 그만큼 벌 것이다. 내가 잘못하기만 한 이들에겐 모두 갚을 것이다.

 어차피 살 것을 다 살았을지도 모른다.

 여한?

 많다.

 깨어났을 때의 적막은 다시 나를 짓눌렀다.

 증오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 와 몸뚱아리만 남은 이 몸을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세상에 해주어야 할 것이 있고, 이것으로 번 돈으로 마지막 해야 할 일이 있다.

 세상에 주는 선물.

 내 아이들을 위한 선물.

 깨어나 침대를 벗어난 나는 멍한 정신으로 컴퓨털 켰다.

 육체만 남아선지 더더욱 피곤하였다.

 사무실이 아니라, 이젠 내 집이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서영 씨가 며칠간 같이 머물고 있었다.

 주현 씨가 가끔씩 보고서를 가져왔고, 나는 간신히 육체를 옮겨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서영 씨에게 말하였다.

 “제게 영혼이라도 제대로 붙어 있다면 좋을 텐데요.”

 서영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극비문서는 다른 이들이 접속치 못하는 데이터베이스 ‘내 머리’에 입력 후엔 서영 씨가 바로 세단기로 한번 갈아 정원에 있는 소각로에 던져넣어버렸다.

 선거를 하고 나서 보관해야 하는 자료는 모두 기밀보안서에 부쳐버리고, 그 외엔 다 소각해버린다. 그것이 오래부터 이뤄져온 전통이었다.

 나는 계속 자료를 접속해 최대한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빼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도 접속치 못하는 팀이 몇 개가 있단 걸 느꼈다. 체감치 못했지만, 무슨 이유로 몇 개의 팀은 나의 데이터 접속을 차단하고 있었다.

 서영 씨가 중얼거렸다.

 “산업스파이 같은 걸까요?”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아버지와 관련됐거나. 개별적인 사안이겠지”라며 말을 흐렸다.

 데이터를 최대한 끌어모으고 끌어모았다.

 팀에 대한 탐구는 계속 되었다.

 사실 팀 자체만 보면 20%가량이 팀을 둘 이상 겸하고 있고, 팀의 수만 82개이니, 이러한 정보쪽의 팀은 완전히 위계가 엉망이다.

 가끔씩 접속이 되다가도 반대쪽에서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어 생각보다 묘하게 회사가 돌아간단 생각도 들었다.

 서영 씨에게 말했다.

 “끊어버린 데이터 내용이 뭐예요?”

 서영 씨가 작게 입을 열었고,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죽기 전에 빨리 돈 모아야 해요.”

 “네.”

 “그래야 제가 할 것을 다 할 수 있어요. 느긋하게 퍼져 있었는데, 죽게 생겼으니 이제 어쩔 수가 없네요. 알 수 있어요, 제 몸에 느껴지는 걸. 좀 더 빨리 일을 진행합시다.”

 서영 씨가 고갤 끄덕였다.

 일본쪽으로 타겟을 노린 데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것보단 좀 더 큰 규모를 위해서였다.

 옛말에 ‘관직을 돈 주고 산다’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사실 역사 대부분의 시기에 있었던 일이고, 이것으로 영주나 총독도 되며, 지방의 작은 왕, 혹은 이것에 능력이 결합되면 황제의 총애를 받아 최고직위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할 뿐이다.

 일본에서 해보고 싶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넓게. 최대한 강력하게.

 최대한 많은 돈.

 최대한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다.

 중얼중얼거렸다.

 ‘돈. 돈. 돈.’

 정신이 나갔을지 모른다.

 ‘죽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벌어야 한다. 가기 전에 뭐라도 하고 가야 한다.’

 서영 씨가 나를 힐끗 보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차단됐다.

 어느 것 하나 열린 게 없었다.

 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불치병의 결과.

 나는 커피를 마셨다.

 설탕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못 말리겠군….”

 너무 썼다.


 나는 아무래도 스스로 정신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점점 더 자각하고 있었다.

 서영 씨는 정장에 안은 얇은 분홍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밖에서 막 돌아와 검은 머플러를 지금 막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뭐 생각해요?”

 “죽기 전에 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아요.”

 그녀가 끄덕였다.

 내가 말했다.

 “저 스스로 미쳐가고 있고, 알지만 저는 누가 봐도 미쳐 있고, 이제 되돌릴 수도 없거니와, 일을 마치고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게 있어요.”

 그녀가 머쓱히 웃었다.

 “당신이 번 돈으로요.”

 “그래야죠. 저는 가도 세상은 남으니까요.”

 나는 그녀에게서 보고설 받아들었다.

 데이터베이스화가 되지 않은 자료도 꽤 됐다.

 그게 필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일본쪽 정치인들과 거래하여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취미라고도 할 수 있었고, 취미라기보단 어떠한 장부였다.

 전혀 엉뚱한 문서도 간혹 보관돼 있었다. 나도 가끔 거슬러 몇 번 심심풀이로 본 적이 있었다. 기록된 문서들이 완벽히 보수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1900년대 초반에는 전혀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다.

 완벽히 정치쪽에 담고 있는 그룹이라 소득도 잡히지 않고, 소득이 잡히면 큰 일 나는 것은 내가 아닌 정치가들이라, 잡힐 일도 없다.

 물론 나는 잡힌다.

 월급쟁이라.

 내 비공식업무는 그룹 내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전략실장이고,

 내 월급받는 공식업무는 하위급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소득신고는 다르니까.

 서영 씨가 말했다.

 “이제 와 후회하지 않아요?”

 “일들.”

 “후회해요. 몇 개월 간. 여러 개. 가장 처음 그 일 있기 전으로 과거 가면 좋겠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때 갔다면… 한 평생이 바뀌었을 텐데.

 이제 달라졌는걸요.

 후회해도 평생이 달라진 것은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일단 돈이나 벌어요.

 내가 가도

 내 선물은 남을 테니까.

 돈이라도 벌어서.

 선물을 하고 가는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서 나 스스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얼마 살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한다. 빨리 모두 마쳐야 한다.

by 스물 | 2009/01/13 03:07 | 자서전에서 소설화로 | 트랙백 | 덧글(0)

죽기 전 마지막 - 2화, 픽션화

 

 여기서부턴 내 자서전이 아닌 소설이다.
 말하자면, 내 일부만을 가지고 전혀 다르게 탄생시킨 이야기이며, 현실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화만이 '자서전'임을 확실히 밝혀둔다.
 2화부터는 '자서전'이 아닌 '소설'이다.

“야망.

 나는 내 끝없는 야망에 짓눌려 있다.

 지구본을 바라보다보니 온곳의 마음들이 나를 부르는듯 하다.

 야심.

 세상.

 세상의 규칙.

 세상.

 세상을 모두 다 가지고 싶다.

 정치를 지배하는 것.

 정치는

 권력의 중심이자, 사실 권력 그 자체이다.

 세계 부의 대부분이 권력을 통해 오고 가며,

 정치는 그것 그 자체이다.

 고로 정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피라미드 모양의 세상’은 지극히 동물적이다.

 오직 동물만이 살아남는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약한 정치인은 죽는다.

 당연하다.

 왜일까?

 강자가 아닌 자는 권력을 맡을 자격이 없다. 강자가 아닌 약자가 나라를 운영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할 뿐이다.

 고로, 정치의 권좌 가장 위엔 가장 강한 자만이 올라서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가 안정하며 강해진다.

 가장 강한 피라미드의,

 32강, 16강, 8강, 4강, 그리고 결승전, 그게 대선이며,

 그 끝의 강자를 만드는 것이 내 일이다.

 결승전엔 사실 어마어마한 재력이 들어간다.”

 재웅은 글을 읽다 말고, 비서를 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죽기 전에 쓸 자서전으로?”

 “크게 나쁘지 않아요.”

 비서인 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웅은 서영의 탁자 위에 걸터 앉아 있었고, 서영은 그가 부탁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재웅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재웅이 무엇을 앓고 있는진 서영도 알고 있었다.

 재웅이 중얼거렸다.

 “남은 시간이 1000일이면 길다더군요.”

 “…기네요….”

 “그렇죠.”

 재웅은 담담했다.

 재웅이 서영에게 말하였다.

 “조금 외롭네요.”

 서영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서영은 재웅을 올려다보더니 “그럼 이것 어때요?”라고 말하였다.

 “뭘요?”

 “여행이라도 다녀와요.”

 “어딜?”

 “일본.”

 “일본?”

 “일본어 할 줄 알죠?”

 “거의 잊지 않았을까.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스페인, 이 정도 배우고 남은 건 영어 정도니까.”

 “괜찮아요. 같이 갈 사람이 있어요.”

 “그래요? 죽기 전에 잘 됐네요.”

 재웅은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서영이 말했다.

 “그 사람도 좋아할 거예요.”

 “누군데요?”

 “재웅 씨를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네 번째로 가장 아끼는 사람.”

 “그럼 나는 아니겠네. 나는 나를 아끼는 것에서 가장 먼 축이니까.”

 “그렇죠.”

 “누구죠?”

 “…저요….”

 “아… 몰랐네요. 세상에서 네 번째였군요.”

 재웅의 표정이 조금 씁쓸했다.

 서영이 말했다.

 “그럼 가시는 건가요?”

 “…….”

 “제 친구도 같이 가요. 그럼 넷이죠.”

 “저. 서영씨. 그리고….”

 “승호. 유정.”

 알았다.

 그들은 입양했던 내 아이들이었다.

 조금 망설여졌다.

 “내 아이들… 유골은 이미 강에 다 뿌렸는데요.”

 “걔네들 친아빠가 도쿄 근방에서 막노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예….”

 아빠도 따라갈게.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는 현장이었다.

 차분했다.

 주주들은 벌떼들이었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벌떼들은 꿀을 보고 달려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정’이 일어난다.

 꽃가루가 꽃에서 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게 바로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이다.

 주주들의 움직임을 통해 기업이 돌아간다.

 이제 몇 년이라도 더 산다면 좋겠지만 얼마 살지도 모를 판에, 이런 곳에 나온다는 것은 조금 유감이다.

 나는 간부측 좌석에 앉진 않았다.

 나는 간부라기엔 나이가 맞지 않았다. 실질적인 실력과 나이의 갭으로 인해 나는 그저 현재로선 브레인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관망이랄 것도 없었다.

 사업계획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뤄진다.

 극비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예상가능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예진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잔 마신 거예요?”

 검지와 중지로 V자를 그렸다.

 “스무 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본 것만 해도 여덟 잔이었다.

 회사라면, 인스턴트 커피를 타거나 자판기 커피인데, 나는 자주 마시기에 포트기까지 준비한 터였다. 물론 여기선 자판기 커피나 마실 뿐이었다.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하며 예진 씨와 시간을 보내던 태호 씨가 “회장님 화내시겠습니다”라고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죠.”

 맞장구를 쳤다.

 ‘…나오지 않으려 했는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현실이었다.

 지극히 현실이었고,

 너무나 현실이었다.

 얼마를 더 살까 하는 것보다 나를 헌신해서라도 세상에 빚을 갚아야 하겠단 생각이 더 들었다.

 ‘이제 다 틀렸어.’

 잠시 얼굴을 두 손으로 덮다 내가 폐를 끼친 나의 스승들이 떠올랐고, 나와 같이 배우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미 늦은 일이었고, 이미 틀린 일이었다. 갚을 수 없다.

 그러다,

 문득 나를 떠난 두 아이가 떠올랐다.

 ‘…아빠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곧 따라가니까. 기다려. 모두가 나를 속여도, 아빤 속이지 않아….

 내 영의 아버지, 하느님,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정신이 이상해지는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공간이 늘어나는것 같이 감각이 뒤틀렸다.

 이렇게 미쳤다간 세상의 룰을 어긴다. 정신나간 짓을 할 순 없었다.

 이를 깨물었다.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해.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인간 같이 살다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원들이 나를 향해 고갤 돌렸다.

 “우리 보너스나 더 탑시다. 접선책 예비하고, 어디 우리 고객으로 괜찮은지 먼저 택해보지요.

 팀에게 책정된 예산도 올리고… 우선….”

 소현 씨가 입을 열었다.

 “…연설 준비시키고, 다음 선거일까지 교육시키는 후보들이 도지사급으로 꽉 차 있어요….”

 “꼭 한국만 있는 건 아니죠.”

 “아…. 일본하고 중국에서 비공개적으로 대전략협력…선거사업했던 것처럼 말인가요?”

 기업 내에서도 용어가 중요하기에 용어 교육이 톡톡했다. 그리고 중국은 대전략협력선거사업이라기엔 ‘중국 자체의 선거제도’ 자체가 우스꽝스러워서 사람들끼리의 로비를 대신 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국민 자체에겐 투표권이 없고, 당원에게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라주기, 인맥 찾아주기, 누구에게 붙는 게 좋은지를 알려주며, 아닌듯 하며 이것저것 엮어 당선시켜주기 따위의 일들이었다. 물론 이런 가벼운 단어로 표현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는지 생각하면 짜증나는 기억이었다. 나는 참여치 않았다. 잉여인원이었던 내 팀원들이 다른 팀에 투입되고, 나는 다른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다 외는…군.’

 “조금이라도 잔업 더 하는 셈 치고,

 …젊을 때 확실히 벌죠.”


 ‘젊을 때 확실히 벌죠’라는 말이 꽤 힘이 된듯 했다.

 정신병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죽기 전에 30억씩 벌고 가자.

 이 그룹이야 오래 전부터 국가의 퍼센테이지 규모의 돈이 오가곤 했다.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란 생각이 모두들에게 전달됐다.

 나는 아예 보너스를 개방해버릴 작정이었다.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자,

 회사의 연역에 도움될 프로젝트들이었다.

 이왕이면

 죽더라도 해보고 싶었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서 죽고 싶었다.


 프로젝트명 ‘죽기 전 마지막 30억’.

 모두가 재미있어했다.

 크게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겐.


 각 연계하는 팀들에겐 위계가 있다.

 각 팀마다 자유도가 다르고, 접근하는 정보의 제한이 다르다.

 복잡해서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어디에나 있는 인사나 총무 따위는 자유도가 아예 없으니 완전히 삭제해서 제외하고,

 오직 몇몇 팀만이 자유로우며, 그 중에서도 그 자유도 순위에 따라 팀끼리 다른 여타 팀의 정보를 자체 프로그램으로 연동시킬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지수를 측정하거나 분석하거나 자질을 평가하는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에서부터 아예 바로 접선하는 영역의 정보나 이익되는 후보들의 개인사을 맡는 개별 팀, 귀찮은 구역담당에서부터 실질적인 전략구체화를 맡는 팀까지 여러 정보 파트의 팀들 이른바 ‘등등’이 있지만, 사실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은 이런 팀들이 있음에도,

 나는 완벽히 자유로운 팀을 이끌고 있다. 이른바 내가 맡은 비정상적인 역량 때문이었다. 어깨에 세상을 메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보접속에 팀원들에겐 한계가 있는데,

 다 풀어 말하자면,

 오늘 나는 그런 정보접속권한을 팀원들에게 다 풀어버렸다.

 정치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기댄 이마를 왼손으로 지탱하며 나는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이 정보들은 ‘머리 당’ 1억원을 요구하던 김대중 정권 때에도 기밀을 풀지 않았던 정보들이었다.

 단순한 후보들의 개인사만이 담긴 것이 아니다.

 정치전략그룹으로서 단순히 국가 내만의 정치전략을 담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 개인권한으로 들어온 정보분석 따위가 그것이었다. 국가 정보기관에도 넘기지 않은 정보들인데, 괜히 국가정보기관이 신경쓰여서 맡겨온 것 따위를 통해 외부의 일도 늘 해왔다.

 왜냐하면 국가 정보기관에서 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공개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국내․외를 통치하기 위해 협력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여행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은 다른 것을 불렀다.

 “…일본쪽으로 잡읍시다….”

 서영 씨가 살짝 웃었다.

 종이커피잔을 내리다 내게 주어진 생각을 떠올리니 소름이 돋혀왔다.

by kongchul | 2009/01/12 23:20 | 자서전에서 소설화로 | 트랙백 | 덧글(0)

죽기 전 마지막 - 1화, 자서전

1화, 자서전 낙서장

2009/01/12 21:41

복사 http://blog.naver.com/aitsheim/30040957474

작년에 내 자서전으로 이러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정치는 대국과 같다.

한국어에서 대국은 바둑을 둠에 있어서 서로가 이루고 있는 형세를 말한다.

바둑.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프로게임이기도 하며, 바둑의 대가는 혹 몇 백 억 가량의 자산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만큼 치열한 전략의 게임이다.

체스판과 유사하나, 칸을 쓰지 않고, 교차선을 쓴다. 세로 19줄 그리고 가로 19줄에 361개의 교차선이 생기는 것이다.

361은 총 영토를 말한다.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자가 이기며, 말은 흰색 구슬과 검은색 구슬을 쓴다.

그 법칙은 단순하여 자신의 말로 이룬 경계선 안은 자신의 영토가 된다. 공책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면 안쪽은 자신의 영토가 되는 식이다.

그리고 상대의 말을 완벽히 둘러싸면 그 말을 자신의 포로로 삼게 되고, 그 말이 점유하던 땅을 자신이 가지게 된다. 이것도 공책으로 비유할 수 있다. 공책 안에 붉은 점을 찍어두고, 푸른 점으로 동그라미를 쳐 가두면 붉은 점을 지우고, 그 붉은 점의 개수만큼 포인트를 딴다. 동그라미 쳐진 그 안쪽은 당연히 자신의 땅이 된다.

바둑의 대가는 많다.

하지만 최고는 한 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최고가 갓 스물이 안 된 경우도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전략도 그와 비슷하다.

물론 대국과는 규모가 달라진다.

규모는 크게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몇 천만 명이며, 작게는 몇 백 만 명이다. 더 작은 규모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그’의 경우엔 소규모는 크게 맡아본 적이 없어서 빼도록 한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 정식명칭 대한 민주주의 공화국은 그 기반을 이루는 인구가 49,024,737명으로서, 약 가로․세로 7천 줄에 ‘말’은 개별적인 전술이다. 미국과 일본을 뛰어넘어 21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게 될 국가로 연구된 국가, 가장 고도로 전산화․자동화․기계화된 사회, 치열한 경쟁과 가속화된 변화로 가득한 숨막히는 사회, 그렇기에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마음’. 이것이 한국이라는 바둑판이다.

전략을 통해 이 판 위에 전술을 펼치면, 전선이 형성되고, 이제 4900만의 무대를 토대로 누가 더 많은 영토를 따내는가로 승부하게 된다.

전술과 전술이 맞부딪치면, 바둑의 단순한 숫자싸움과는 달리, 개별적인 전술 하나하나가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며 그 말 하나하나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

정치전략. 바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렵고,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힘이 필요하다.

‘무엇을 원할까?’

전략은 모두 욕망에 기초해 있다. 전쟁 자체가 욕망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바른 욕망을 사랑 내지 애호라 표현한다면, 그릇된 욕망을 대개 ‘욕망’이란 단어 그 자체로 표현한다. 이 책에선 둘 다를 포함하는 단어로 ‘욕망’이란 단어를 쓸 것이다.

전략, 욕망, 사람들의 마음.

정확히는 ‘심리’.

그것이라면, 꿰뚫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

이런 정치적인 구도와 같은 바둑의 대국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국가적인 게임.

한 국가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둘이나 보내고, 엘리트로 가득한 거대한 몇 백 억의 캠프에서 직접지원하며, 전국적인 매스컴, 방송, 신문, 라디오까지 들끓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키려던 텃밭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덜컥 사람 한 명이 나서서 그 전체적인 흐름을 뒤집어버렸다. 그리곤 아무런 인지도나 지지도도 없던 후보자를 당선시켰다. 한 명이 전 국가를 상대로 이긴다.

그가 나라면 믿겠는가?

2007년의 일이다.

또 이런 바둑의 대국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린 그가 40대의 프로만이 쓸 수 있는 문체로 한 나라의 총재를 휘어잡아 장관을 주면 일을 해주겠다고 설득시켰다. 물론 이 일은 총재가 직접 나섰음에도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재오의 방해로 실패가 됐다. 그래서 그는 이재오를 싫어한다.

이게 바로 2002년의 일이다.

수많은 대국을 말해줄 수 있다.

그가 해온 대국은 사람을 영토삼아 전술로 사로잡는 일이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대통령, 정당의 총재들, 전직으로 치면 장관, 차관, 수많은 정치 관료들, 기본적인 국회의원들, 매우 작게는 도지사와 시장들,

그들의 전술을 무엇이 이루고 있든…- 하버드, 도쿄대, 서울대, 유럽 유학을 다녀온 이론가들, 경제학과 경영학을 배운 이들, 정치학 박사들, 크게 취급을 안 해주는 명문대 교수들을 비롯 크게는 천 억에 달하는 자금과 작게는 몇 백 억에 달하는 자금들, 한 해만 몇 조의 선거자금이 공식적으로 도는 비공식적으론 산출불가한 규모의 자금들,

그들의 무대가 어디이든, 그리고 그들의 타겟이 누구이든…- 대한민국 전체 5천만, 서울 1천만, 혹은 경기도 1천만, 경상도 1천만, 이러한 천만 단위의 일들, 작게는 몇 백만 규모의 일들, 혹은 어쩔 수 없이 연으로 묶인 사람의 부탁이라 해주는 그 이하의 규모, 그리고 기업가, 노동자, 학생, 공무원, 모두가 인간이 가진 하나의 마음이지만, 자신이 처한 바에 따라 여러 성향을 보이는 이들,

그 어떤 시기와 방법과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소속 정당이 깨져 절대적으로 당선이 불가능한 상황, 슬럼프와 루머들, 야비한 적의 공격, 인지도와 지지도에서 그 둘 다 1%를 기록하는 이들,

한 명이면 충분했다.

나, 1986년 7월 10일생,

공재웅.

나에 대한 논픽션이다.

돈이 필요하다.

나의 삶을 지탱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의 논픽션을 이렇게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땐 돈을 벌고 싶어 이 글을 썼었다.

 1년간 전혀 글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다른 데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이제 와 몇 개월 전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그 사이 1주도 안 되는 기간의 일들, 그것을 참회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남모르게 투자했었는데 일은 이렇게 되었다.

 결국 이리 됐을 것이다.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죽기 전에 글을 쓰고자 한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정말로 사랑했다.

 이제 와 육체만 남은 나지만,

 그래도 당신들을 정말로 사랑했었다.

 하느님, 영의 아버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을,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그대께서 항상 보호해주시고 항상 지켜주시고 항상 구해주시고 항상 도와주소서.

 돈을 벌고자 썼던 서문이었지만,

 이젠 죽기 전에 쓰는 서문이 되었다.

 불치병이다. 살고 싶지만 이젠 자력으론.

 얼마 살까 하는 말은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다.

 내 스스로 잘 안다.

 돈을 벌기 위해 쓸 것이다.

 가기 전에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몸만 남아서라도 해야 할 것이 있다.

 뜻이 어디에도 통하지 않으니 돈이라도 모아서 다른 일에 보람차게 쓰고 갈 생각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자서전은 이제 안 쓸 것이다.

 내 이름과 몇 가지 설정만을 빌린 전혀 엉뚱한, 나완 완벽히 다른 인물을 바탕으로, 연애소설을 쓸 생각이다.

 그게 잘 팔리니까.

 아쉽다.

 너무 슬프다.

 하지만 이제 남은 방법은 그것이 전부이다.

 연애소설.

by kongchul | 2009/01/12 21:49 | 자서전에서 소설화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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